쿠리(苦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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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값싼 외국인 노동자를 의미하는 영어 쿨리(coolie)가 중국과 인도출신의 하층 이주노동자를 지칭하게 된 것은 1820년대 이후다. 전 세계에 식민지를 획득, 성장의 외적 기반을 확보한 영국은 19세기 초 인도주의에 배치된다며 노예제도·노예무역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식민지의 농장·광산·철도건설 등을 담당할 노동력 확보가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자 그 대안으로 주목받은 게 중국과 인도의 하층민이었다. 영국은 합법적 체류와 푼돈을 내걸었고, 뭔가 다른 삶을 찾아보자는 동기가 강했던 중국과 인도출신의 하층 노동자들은 반은 속고 반은 자발적으로 1820년대 후반부터 몸을 팔아 국외로 빠져나갔다.

영국과 구미 식민 경영국들에 이들은 노예를 대신할 합법적·자발적 이주 노동자였다. 하지만 하층 노동력의 급격한 유출을 겪고 비인간적 처우를 받는 자국민을 보호할 힘이 없었던 중국과 인도에서는 이러한 유출 혹은 이주가 여전히 불법이었다. 특히 중국에서는 해외로 빠져나가다 배가 난파돼 수장(水葬)되기도 하고 병에 걸려 제대로 된 치료도 없이 버려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에 나가 인생을 바꿔보겠다는 숫자는 점점 늘어 1820년대에는 평균 6천~8천명이 싱가포르로 송출됐다. 이후 쿠리(苦力)무역은 노예무역 이상으로 대규모화돼 1847년에는 페루에 12만명, 쿠바에 15만명 이상의 쿠리가 존재했다. 대륙횡단철도 건설을 위한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했던 미국에서도 쿠리는 대단한 인기를 끌어 철도 건설 노동력의 80% 정도가 중국인 쿠리로 충원됐다.

1860년 중국 정부는 더 이상 쿠리무역을 비합법적 상태로 놓아둘 수 없어 베이징조약을 통해 이를 인정했다. 쿠리가 중국 공문서에 합법적으로 등장한 이 시점을 계기로 해외송출은 더욱 적극화됐다. 이후 이들은 현지에 뿌리를 내려 동남아를 중심으로 전세계에 약 2천3백만명 이상이 연결되는 화교(華僑)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요즘 한국에도 중국동포 및 제3세계 노동자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고 몰려들고 있다. TV드라마에도 이들이 소재로 등장하고 가리봉동 등에는 집단거주촌도 생겨날 정도다. 하지만 이들이 처한 환경은 1세기 전 쿠리들과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월드컵에 모든 이슈가 매몰된 현실 속에서도 이들의 처우개선과 합법적 지위보장을 위한 모임이 활발하다. 이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높아질 시점이다.

김석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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