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 "36년 만에 恨 풀었다" : '숙적'아르헨 격파 표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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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82년 포클랜드 전쟁에서 부딪쳤던 '축구의 종가' 잉글랜드와 숙적 아르헨티나가 맞붙은 7일 일본 삿포로돔의 월드컵 구장(球場)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뜨거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전반 44분 잉글랜드의 데이비드 베컴이 페널티킥한 공이 아르헨티나의 골문에 꽂히자 잉글랜드 전역은 환호의 물결로 일렁였다. 런던의 펍(선술집)이나 스포츠 카페에서 경기를 시청하던 런던 시민들은 서로 부둥켜 안은 채 "베컴, 베컴"을 연호하며 기뻐했다. 경기 도중에 한산했던 런던 시가지는 잉글랜드의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영국 국기를 매단 차량들이 쏟아져나와 경적을 울리며 승리를 축하했다.

영국 BBC방송은 이날 경기에 대해 '잉글랜드의 달콤한 복수'란 제목으로 승전보를 전하면서 "잉글랜드팀이 숙적 아르헨티나를 꺾고 16강을 향한 거보(巨步)를 내디뎠다"고 평가했다.

○…이날 낮 12시30분(현지시간)에 시작된 아르헨티나전 중계를 보기 위해 영국 근로자 5명 중 한명이 하루 휴가를 냈다고 영국 언론들이 보도했다. 또 영국 내 전직장의 70%가 직원들에게 사무실에서 경기중계를 시청하도록 허용했으며 대형 스크린을 사무실 내에 설치하고 음식을 무료로 제공하는가 하면 점심시간을 연장해줬다.BBC방송은 이날 휴가를 얻지 못한 회사원 2백50만명이 '꾀병'으로 결근, 수천억원의 경제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추산했다.

○…공식 일정을 다음주로 미룬 채 총리별장에서 경기를 시청했던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는 경기 직후 "승리에 가슴이 떨리며 잉글랜드팀은 승리할 자격이 있다"고 말하며 기뻐했다. 블레어 총리는 "잉글랜드 선수들은 시작부터 끝까지 기술과 강인한 의지를 보였다"고 치하한 뒤 스웨덴 출신의 에릭손 감독에게 승리의 공을 돌렸다.

○…예정된 행사 때문에 TV를 시청하지 못한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행사 도중 경기 진행 상황을 보고받았으며 찰스 왕세자와 왕세손인 윌리엄·해리는 궁에서 중계를 지켜봤다고 버킹엄궁 관계자가 전했다.

○…AP통신은 잉글랜드전 패전 직후 "아르헨티나의 월드컵 열기가 침묵으로 변했다"고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분위기를 전했다.

이 통신은 목축박람회장에 설치된 15m크기 대형전광판 앞에 모였던 수백명의 시민들은 "'삿포로의 결투'에서 전반 베컴의 페널티킥이 골네트를 가르자 곳곳에서 신음소리를 냈다"며 "모두들 충격 속에 말을 잊었다"고 전했다.

반면 시내 중심가의 지브롤터 선술집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50명의 영국인 관광객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축제를 즐겼다고 통신은 덧붙였다.

○…아르헨티나 유력 일간지인 나시온은 '제2의 포클랜드 전쟁'이라며 의미를 부여한 잉글랜드전에서 패하자 "삿포로돔에서 아르헨티나가 무너졌다"고 제목을 뽑고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신문은 "아르헨티나는 전후반 내내 잉글랜드 문전을 위협하며 경기를 주도했지만 잉글랜드의 방어망을 깰 전술이 부족했다"고 패인을 분석했다.

또 아르헨티나의 채널13TV의 TN24 뉴스등 일부 언론들은 "잉글랜드 팬들이 삿포로돔을 가득 메워 일방적인 응원을 펼쳤다"며 "경기 시작 전부터 이들의 함성과 휘파람소리가 돔에 울려퍼져 아르헨티나팀을 압박했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잉글랜드와 아르헨티나의 경기가 열렸던 삿포로돔 경기장에서는 수천명의 잉글랜드 관중이 쏟아내는 열광적인 함성으로 잉글랜드팀은 사실상 '홈 경기의 이점'을 봤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잉글랜드 관중은 아르헨티나 국가가 연주되는 도중에도 영국 국가인 '신이시여, 여왕을 보호하소서'를 합창하는가 하면 경기장 안팎을 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으로 도배하다시피했다.

○…영국의 도박회사인 '북메이커'는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 1천2백만파운드(약 2백10억원)라는 사상 최대의 판돈이 걸렸다"고 7일 발표했다. 승률은 11대10으로 아르헨티나의 승리를 예상하는 사람들이 조금 많았다.

○…일본 삿포로돔 구장에 일찌감치 도착한 수백명의 아르헨티나 응원단은 경기 시작 전부터 준비해온 하늘색 국기로 관람석을 물들이며 응원에 나섰다. 아르헨티나 응원단의 디에고 사브릴(35)은 "아르헨티나의 경제는 파탄지경이다. 그러나 아르헨티나가 숙적 영국에 이기기만 하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돈 걱정을 잊게 될 것"이라며 자국팀의 승리를 기원했다.

○…삿포로 경찰 당국은 혹시 일어날지도 모를 영국 훌리건들의 난동에 대비해 홋카이도 전체 경찰의 70%인 7천여명을 동원해 '1급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삿포로 경기장을 찾은 영국 응원단이 8천명임을 감안하면 경찰이 영국 응원단원을 거의 1대1로 마크한 셈.

월드컵을 앞두고 일본 경찰은 시위진압 전문요원을 영국에 파견해 영국 경찰로부터 ▶훌리건 판별 요령▶난동 진압 방법 등과 관련한 노하우를 전수받기도 했다.

워싱턴·뉴욕·파리=김진·신중돈·이훈범 특파원, 박소영·강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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