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에 우는 드라마族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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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온통 축구만 틀어 놓으니 사람이 살 수가 있나. 아이고 한달이 지루해서 어떻게 견디는가…." "멍하니 축구나 보는 수밖에. 아니면 밤늦게까지 잠 안자고 버텨야지."

얼마전 한 식당에서 할머니 두 분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됐다. 지난달 31일에 시작된 월드컵 경기 TV 중계 때문에 보고 싶은 드라마를 볼 수 없다는 한숨 섞인 푸념이었다.

전국이 월드컵 열기로 들썩인다. 특히 지난 4일 한국의 대 폴란드전 승리로 열기는 더해가고 있다. 한국과 같은 조에 속한 3개국을 모르면 바보 소리를 듣는다. 송종국·김남일은 '히딩크의 자식들'이요, 영국의 베컴의 부상 부위는 왼쪽 발등이라는 등 풍월을 읊어야 어디 명함이라도 내밀 판이다.

축구 얘기로 온나라가 떠들썩한 이 마당에 축구가 '미움의 대상'인 사람들이 있다. 평소 일일드라마·미니시리즈 등 TV 드라마를 섭렵해 온 드라마족(族)들이다. 방송국엔 "TV 3사에서 똑같은 그림의 축구만 틀어대니 볼 게 없다"는 불만 섞인 항의가 간간이 들어온다. 그나마 다른 사람들은 "축구 열기에 웬 드라마냐"는 조롱이 싫어 드러내놓고 불만을 표하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드라마를 안볼쏘냐. 이들의 드라마 사랑은 객관적 수치로 드러난다. 지난달 31일 월드컵이 개막된 이후에도 '여인천하''위기의 남자' 등 화제작은 30%에 육박하는 시청률(닐슨미디어 리서치 조사)을 기록했다. 이들 모두 경기가 끝난 밤 11시 이후 심야시간대에 방송된 점을 고려하면 놀라운 수치다.

그러나 한국전 등 중요 경기가 있는 날엔 드라마가 편성에서 급작스럽게 빠지는 등 여전히 서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 와중에 케이블TV의 드라마 전문 채널은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다.'SBS 드라마 플러스'는 지난 2·3일 케이블 내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전통적으로 만화·음악·영화가 강세를 보이는 케이블에서 드라마가 1위를 차지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지상파의 드라마족들이 케이블로 대거 이동한 것이다. 오후 3시부터 밤 10시30분까지 3개 축구 경기가 열리는 시간에 '유리구두''화려한 시절''여고시절'등 드라마를 연속 방영해 짭짤한 재미를 봤다.

축구만큼이나 여전히 식지 않는 드라마 애청자들의 열기. 축구 팬만큼 드라마 팬도 좀 생각해달라는 건 너무 지나친 요구일까.

박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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