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힐 안 빠지는 길이 여행 길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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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최근 ‘여행(女幸)길’로 인증받은 서울 강북구 수유3동 지하철 4호선 수유역 근처의 인도. 보도블록의 틈새가 넓고 보행을 가로막는 가로수가 있던 길(왼쪽)이 하이힐 굽이 빠지지 않도록 보도블록 사이의 틈이 2㎜ 이하로 조밀해졌고, 가로수도 자리를 옮겼다. [서울시 제공]

2일 오후 2시 서울 신정3동 볏골공원 지하 주차장. 두 명의 여성이 분홍색 선이 그어진 여성전용 주차구역에서 줄자를 꺼내 면적을 잰다. 주차장 기둥마다 달린 비상벨도 눌러 본다. “삐” 소리와 함께 현재 위치를 표시하는 숫자가 관리사무소 전광판에 뜨는 걸 확인하고 메모한다. 지하 1, 2층의 주차장을 30여 분간 훑어본 신경선(42) 건축가와 대학원생 김보라(25)씨는 “전반적으로 여행 가이드라인에 맞는 곳”이라고 평가했다.

이들은 서울시가 지난해부터 추진 중인 ‘여성행복(여행) 프로젝트’ 실사단의 일원이다. 이 프로젝트는 ‘여성이 체험한 것을 정책에 반영해 여성이 살기 좋은 환경으로 서울을 바꾸자’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서울시는 지난해 10여 명의 여성 건축가·정책전문가로 구성된 태스크포스를 꾸렸다. 이들은 반년에 걸쳐 1000여 명의 여성을 대상으로 조사해 평가표를 만들었다. 이 평가표를 바탕으로 전문가 한 명과 일반 시민 한 명으로 꾸려진 실사단 11개 조가 ‘여행(女幸)공간’을 평가하기 위해 서울 곳곳을 누비고 있다.

TF팀 대표인 이재림 대한여성건축사협회장은 “여행 화장실은 줄을 서지 않는 화장실”이라고 말했다. 이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여성 변기 수가 남자 화장실의 소·대변 변기수를 합친 것 이상이어야 한다. 화장실에 어린이를 위한 용변시설을 두고, 화장실 칸막이 문은 바닥에서부터 8㎝ 이상 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재림 회장은 “8㎝는 칸막이 밑으로 손이 들어오지 못하고, 안에서 사람이 쓰러졌을 경우 문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높이”라고 설명했다.

여행길은 ‘하이힐이 빠지지 않는 길’이다. 보도블록 사이의 틈이 2㎜ 이하여야 한다. 도로의 폭도 1.5m 이상으로 유모차 두 대가 동시에 지나갈 수 있어야 한다. 여행 공원·주차장은 ‘범행이 일어나지 않는 안전지대’로 설정했다. 공원의 가로등 조도는 6~15럭스 이상으로 10~20m 떨어진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밝기다. 주차장은 출입구에서 30m 이내에 여성전용 주차공간(전체 주차대수의 20% 이상)을 두고, 야간 조명은 200럭스 이상으로 대낮처럼 밝아야 한다.

서울시는 실사단의 평가 내용을 바탕으로 심의위원회를 열어 검증을 한다. 지난해 신청한 998곳 중 258곳(약 26%)이 ‘여행’ 시설로 인증받았다. 서울시는 올해 300개의 여행시설을 추가하고 하반기에는 아파트·기업까지 인증에 나설 계획이다.

한은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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