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공연장·음반업계 월드컵이 밉다 미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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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한국 팀의 선전으로 온나라가 월드컵 축제 분위기에 취해 있다.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일과시간에도 여가시간에도 국민의 눈과 귀는 온통 축구에 쏠린 모습이다. 반면 영화·대중음악·공연 쪽은 찾는 발길이 뚝 끊어져 '잔인한 6월'이라며 울상이다. 다소 예상된 일이라 사전에 대비를 하는 바람에 대형 공연물이 취소된다든가 하는 불상사는 없지만 전체적으로 많이 위축된 건 사실이다. 이에 따라 문화계는 월드컵과 연계한 이벤트를 벌이는 등 고육책을 내놓고 있다.

◇극장가=월드컵 여파가 가장 직접적으로 몰아친 곳은 극장가. 서울 종로 3가를 비롯해 주요 상영관이 몰려 있는 거리에는 평일은 물론 주말에도 매표소 앞이 썰렁하다.

영화인회의 집계에 따르면 월드컵이 개막된 지난 주말 서울 관객 수는 24만6천명으로 평소의 절반 수준을 조금 넘었다. 편당 관객 수도 급락해 지난 주말 1위인 '묻지마 패밀리'가 거둔 서울 관객 4만명은 한달 전 박스오피스를 기준으로 하면 5위에 해당하는 저조한 성적이다. 이는 월드컵 기간 중에는 흥행영화를 많이 개봉하지 않는 데다 관객들의 눈도 TV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영화배급사 청어람의 채상병 실장은 "영화사들이 월드컵 기간에는 대형 흥행 영화를 개봉하지 않는데다 월드컵의 열기가 예상보다 강해 전국적으로 평균 30% 정도 관객 숫자가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영화사들은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한 뒤 계속해서 한국전 경기를 관람하도록 하거나 외국인을 위해 영어ㆍ중국어ㆍ일본어 자막을 입혀 상영하는 등 묘안을 짜내고 있으나 큰 효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다.

◇음반업계=장기 불황의 늪에 빠진 음반업계는 월드컵으로 설상가상의 상태에 처했다. 그러나 한국팀의 16강 진출 염원을 담은 '2002 사커 페스티벌'이 그나마 선전해 숨통을 틔우고 있는 실정이다.

이 음반에 수록된 조성모의 '함께 하는 순간', 김건모의 '아이 러브 사커(I Love Soccer)', 박효신ㆍ전소영ㆍAnn이 함께 부른 '원(One)'은 월드컵 개막일인 5월 31일 각각 15회·12회·19회가 방송돼 단일 음반 사상 최다 방송횟수(46회)를 기록했다. 이 같은 붐을 타고 지난 주 발매되자마자 날개돋친 듯 팔리고 있어 아나스타샤의 '붐(Boom)'이 담긴 월드컵 공식 음반을 위협하고 있다.

가요계에서는 국내 톱스타들이 대거 참여한 데다 축구공 모형의 패키지에 국악 음반을 함께 수록해 음반 애호가들의 인기를 끄는 것으로 분석했다. 병역 파동으로 미국으로 돌아간 유승준이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발표한 노래도 이 음반에 담겨 있다.

◇공연계=예술의전당이 월드컵을 기념해 준비한 세계적 성악가 로베르토 알라냐·안젤라 게오르규 부부 공연, 세계적 명성의 안무가 나초 두아토가 이끄는 스페인 국립무용단 공연 등이 평소보다 저조한 예매 성적으로 주최측이 당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예술의전당은 알라냐·게오르규 공연(12일 오후 7시 30분) 시작 15분 전과 막간휴식 시간에 6백명분의 프랑스 보르도산 고급 포도주를 서비스할 계획이다.

월드컵 공동개최를 자축하며 만든 한·일합작 무용공연 '갑판 위의 새들'(8~9일 호암아트홀)도 저조한 예매율로 고민하던 끝에 발품을 팔아 각 대학 무용과를 찾아다니며 입장권 팔기에 나섰다.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6월 23일까지 공연하는 극단 유의 연극 '생존도시'는 한국전이 있는 14일 입장 관객에게 50% 할인혜택을 준다. 이날은 공연시간도 평소보다 30분 빠른 오후 7시로 앞당겨진다.

한편 6월 마지막 날 막을 내리는 대형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은 이같은 공연계의 전반적 불황에도 불구하고 높은 예매율을 유지했다.

◇방송계=TV 방송사는 월드컵 중계로 광고 특수를 누리는 등 가장 활기를 띠고 있지만 일부 드라마와 교양·오락 프로는 조기 종영되거나 잠정 중단되는 등 '불똥'을 맞고 있다.

MBC 월화드라마 '위기의 남자'가 지난 3일 예상보다 일찍 막을 내린 것도 월드컵 때문이다. 월화 미니 시리즈는 6월 한달간 '휴업'한 뒤 7월부터 '고백'을 후속 프로로 방영한다.또 '!느낌표''음악캠프''목표달성 토요일'등 주력 프로도 2~3주간 중단할 계획이다.

SBS는 지난 4일 한국이 첫승을 거두자 방송 예정이었던 '여인천하'와 '류시원 황현정의 나우'를 긴급 취소한 데 이어 이번 주말엔 '토요일이 온다''그것이 알고 싶다'를 쉴 예정이다. KBS 1TV는 '한민족 리포트''수요기획'등 밤 10시 이후의 프로그램을 당분간 방영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한편 방송사들은 높은 광고 수익으로 미소를 짓고 있다. 지난 4일 한국과 폴란드전 중계로 MBC와 KBS는 약 18억원, SBS는 16억8천만원의 수입을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이 시간대에 책정된 광고 단가는 MBC와 KBS가 3천만원, SBS가 2천8백만원대였다. 평소 이 시간대 광고 단가는 1천만원 내외다. 그러나 한국이 출전하지 않는 경기의 광고 단가는 한국전의 4분의1에서 절반 사이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영기·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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