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연구에 빠져 스무번 오갔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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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1면

"평생 남극을 찾게 될거야." 약 20년 전 지도교수의 예언은 그대로 적중했다. 매년 11월에 남극행 비행기를 타게 된 것. 그 덕에 발표한 논문만 1백여편이다. 이젠 북극 다산기지의 책임자 자리도 맡았다.

1983년 10월. 그는 남극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루이지애나 주립대 학생이었던 그는 박사과정 논문 연구를 위해 미국의 남극 과학기지인 맥머도 기지로 향하는 길이었다.

비행기가 착륙했다. 미국인 지도교수는 트랩에서 내리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두번 다시 남극에 오지 못하리라고 생각하겠지만, 평생 남극을 드나들게 될 거야."

예언은 적중했다. 학생으로서 그 말을 들었던 김예동(金東·48·한국해양연구원 극지연구본부) 박사는 그 뒤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남극을 20여번 드나들며 오존층 파괴가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 등을 연구했다. 세종기지 대장으로 1년씩 가있던 게 89년과 96년 두번. 또 해마다 남반구에 여름이 찾아오는 11월부터 1월까지 어김없이 남극에서 연구했다.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1백여편의 남극 관련 연구 논문을 국제 학술지에 발표했다.

"생각해 보면 당시 지도교수의 말은 예언이 아니라 과학자에게 던지는 축복이었습니다."

그는 얼마 전 문을 연 북극 다산 과학기지 연구 책임자로 임명됐다. 오는 7월부터 두달쯤 북극에서 연구 활동을 한단다. 그는 "앞으로 북반구의 여름은 북극에서, 남반구의 여름은 남극에서 지낼 생각"이라고 했다.

"극지를 찾는 것은 연구의 보람 때문이지요. 이를 빼면 정말 단조로움으로 가득찬 생활이어서 견디기 힘들 때도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과 하얀 얼음, 짙푸른 바다뿐이죠. 연구 활동을 빼고 나면 뭐 별 소일거리도 없어요."

시속 1백50㎞의 강풍도 늘 대하는 것이기에 단조로움을 덜어주지 못한다고 했다.

"지금은 세종기지에서도 인터넷 화상채팅 등으로 한국의 가족들과 자주 대합니다. 하지만 초기인 89년에는 통신 사정이 안 좋아 전화도 잘 못했어요. 위성전화를 하는 데 분당 10달러 들었는데 당시로서는 큰 돈이었죠. 저녁에 소주 한잔 걸치고는 밀어닥치는 외로움에 가족들에게 전화하면 1,2백달러는 금방 날아갔죠."

라디오도 잘 들리지 않았다. KBS가 해외로 내보내는 방송이 있었지만 남극까지 가기엔 전파가 약했다. 단파라디오의 지직거리는 잡음 속에 한국어인지, 2차대전 때 미군이 암호로 사용했다는 나바호 인디언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소리가 왱왱거렸다.

"그래도 고국 소식이 궁금해 당번을 정해놓고 뉴스를 받아적게 해 나중에 대원들 모두에게 알려줬습니다. KAL기 폭파범으로 붙잡혔던 김현희 재판 소식을 모두 가장 궁금해 했던 기억이 나네요."

단조로움을 깨뜨리는 사건도 가끔씩 일어났다. 89년 처음 세종기지에 갔을 때의 일이다. 연구원 네명과 함께 고무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그런데 그만 엔진이 고장났다. 고무보트는 정처없이 표류하기 시작했다. 무전기로 세종기지에 연락했지만 당시 그 곳엔 보트라고는 그가 탄 것 하나밖에 없어 구조할 방법이 없었다.

"표류하고 한시간쯤 지났을까요. 갑자기 보트 옆에서 커다란 고래 한마리가 뛰어올랐다가 첨벙 다이빙을 하는 거예요. 보트가 꼬리에 한방만 맞으면…. 대원 모두 이젠 죽었구나 생각했죠."

한시간을 더 정처없이 떠돈 뒤 엔진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추운 곳에서는 옥탄가 높은 최고급 휘발유를 써야 하는데, 그걸 몰라서 보통 휘발유를 가져갔다가 생긴 해프닝이었습니다."

통신 사정 등 모든 것이 나아졌으나 그래도 세종기지 연구원들은 '작은 세상'에서 살아간다고 얘기했다.

"15명 내외지만 그것도 하나의 사회라서 요리 담당, 정비 담당 하는 식으로 역할 분담이 필요합니다. 또 인원이 적은 만큼 한사람이 여러 역할을 해야 할 때도 있지요."

한번은 의사가 탈이 났다. 밥을 먹다 혀를 깨물었던 것이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도 잘 못했다. 거울을 통해 혀를 살펴본 의사는 상처를 꿰매야겠다고 했다. 그러나 어쩌랴.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지만 의사가 제 혀 꿰매기는 그보다 백배는 어려울 터. 세종기지 총 지휘자였던 金박사는 궁리 끝에 그나마 바느질을 제일 잘하는 재봉 담당에게 수술을 명했다.

하지만 경험도 없이 바로 수술할 수는 없는 노릇. 실습이 시작됐다. 의사의 지도 아래 식량용 닭고기를 꺼내 메스로 일부를 자른 뒤 꿰매는 연습을 되풀이했다. 한참을 지켜보던 의사는 혀를 잘 놀리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단호히 말했다. "수술받지 않겠다."

꿰맸을 때보다 회복에 훨씬 더 시간이 걸렸고,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지만 결국 상처는 아물었다.

金박사는 지금도 처음 남극에 내리던 순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말한다. "맥머도 기지가 있는 에레버스 섬에는 활화산이 있습니다. 제가 처음 대했던 남극은 한쪽엔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끝없는 얼음 평원이 펼쳐져 있고, 다른 쪽에는 활화산이 연기를 뭉텅뭉텅 내뿜는 모습이었어요. 제가 지금까지 본 모든 풍경 가운데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계속 극지를 찾게 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매년 11월부터 1월까지 남극에서 보냈기에 단 한번도 크리스마스를 같이하지 못한 점이 아이들에게 가장 미안하다고 했다.

"영국 연구진은 30년 연구 끝에 남극의 오존층이 파괴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극지 연구는 이렇게 오랜 시간을 두고 해야 합니다. 저도 체력이 닿을 때까지 극지에서 연구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권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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