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비우지 않으면 책의 의미 들어설 자리 없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73호 08면

지식을 얻기 위해 독서를 한다. 그런 점에서 ‘2차적인 일(第二事)’이다. 즉 도구적 의미를 갖는다. 『성학집요』는 책 읽는 자세를 이렇게 적고 있다. “몸을 가다듬고, 자리를 잡는다. 시선을 차분하게 두고, 작게 읊조린다. 마음을 비우고, 넉넉히 유영한다. 이때 자신과의 연관을 놓치지 않고 성찰한다. 한 구절을 읽으면 이것을 어떻게 적용 실천할지를 고민한다.(朱子曰, 讀書, 須要斂身正坐, 緩視微吟, 虛心涵泳, 切己省察, 讀一句書, 須體察這一句我將來甚處用得.)”

한형조 교수의 교과서 밖 조선 유학 : 성학집요 (11)- 독서법(讀書法), 옛것을 익혀 창조를 연다

독서의 함정① 망각과 조급함
책을 읽어도 그때뿐인 걸 어떡하나. 책이 심신의 연관을 놓친 탓이다. 그때 “책은 책, 그리고 나는 나(書自書, 我自我)”로 따로 논다. 이 ‘망각’이 첫 번째 위험이다. 두 번째는 지식을 ‘소유’하려는 탐욕이다. 마음은 조급해서 여러 책을 이것저것 사냥하듯, 섭렵(涉獵)하려 든다. 한꺼번에 여러 책을 뷔페 식으로 맛보지 말라. 주자는 유머를 섞어 이렇게 말했다. “요즘 학인들은 읽은 것도 읽지 않은 것 같고, 읽지 않은 것도 다 읽은 것 같다(今之學者, 看了也似不曾看, 不曾看也似看了).” 기가 막힌 비유 아닌가. 읽어도 내용을 모르고, 누가 물으면 안 읽고도 아는 척 하는 지식의 스노비즘을 정말 콕 집어냈다.

독서법의 핵심은 ‘집중’이다. 허심평기(虛心平氣), 숙독정사(熟讀精思), “마음을 비우고, 컨디션을 편안하게 유지하며, 입에 붙듯이 읽고 정밀하게 사유하라.” 과시를 잊고, 소유의 탐욕을 내려놓을 것. 페이지 뒷면으로 향하는 마음을 다잡아 지금 읽고 있는 책에 집중하는 것, 그것이다. “심신을 이 한 단락에 집중해서 바깥에 무슨 일이 있는지 묻지 말아야 한다.” 흩어진 전표 뭉치처럼 단락 단락, 일정한 분량들이 묶이다 보면 어느새 훌쩍 자라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독서의 함정② 자신을 비워라
아, 하나 빠트렸다. 주자가 거듭거듭 경계하는 것이 하나 있다. “자신을 비울 것.”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책의 의미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요즘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생각을 세운 후에 책에 접근한다. 그래서 옛사람들의 말을 온통 끌어다가 자기 생각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를테면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향해 설교하고 있는 형국이라 할까. 주자는 제발 “남의 말을 다 듣고 나서 판결을 내려달라”고 호소했다. “이는 송사를 처리하는 것과 같다. 마음에 을을 지지하는 생각이 있으면 갑의 옳지 않은 점만 찾게 된다.” 책은 나서서 맞이하는 것이 아니니, 독자는 책이 다가올 수 있도록 ‘한 발 물러서서’ ‘참고 기다려야 한다.’ 이 지침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마음을 열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것. 사물로서 사물을 보아야지, 네 선입견과 투영으로 사물을 보지 말라(放寬心, 以他說看他說. 以物觀物, 無以己觀物).”

의혹들과의 한판 승부
마음을 비우고 책을 향해도 처음에는 ‘멀리서 본 꽃밭’의 풍경만 보인다. 혹은 ‘밖에서 바라본 집처럼’ 외관만 보인다. 더 가까이 꽃의 형태와 색깔을 구분해야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 구조와 인테리어를 살펴야 한다. 문장들은 처음 막연한 인상을 보여주다가 두세 단락, 나아가 여러 단락으로 분절되어 보이게 된다. 흡사 『장자(莊子)』 소잡이(<5E96>丁)의 눈에, “처음에는 소의 외관만 보이다가” 도가 깊어지면서 “그 세부 골격과 근육이 눈을 감고도 환해지는” 것과 같다. 그러다가 한 글자 한 글자가, 저마다 있을 자리에서, 온몸으로 외치고 있는 것을 알아채게 된다.

독서가 깊어지면 이해와 더불어 의문이 같이 자란다! “의문이 없는 것이 초학자들의 공통된 병통입니다. 평일에 그저 많이 읽고 습득하기에 바빠, 자세히 읽지 못한 탓이지요.” 의문은 삶의 구체성이 제기하는 도전이다. 이 의혹이 깊어지면, “어느 것 하나 의문과 곤혹이 아닌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른다.” 이 혼돈이 공부가 크게 진전될 기틀이다. 율곡은 주자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이 과정을 한 번 거치고 나면 점점 의혹이 풀리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의혹이 다 풀려 전체가 서로 연관되고 소통되는데, 이때가 배움이 성취되는 때이다.” 개혁군주 정조는 “남들이 모두 의혹하는 지점에 고개를 끄덕이고, 아무도 의혹을 가지지 않는 곳에 질문의 칼을 들이미는 것이 공부”라고 썼다.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정독을 가르치자
주자는 특히 머리가 좋은 사람을 경계했다. 이해가 빠르면 ‘주어진 언설’을 바로 외우고, 곧바로 ‘사용’에 들어간다. ‘문장’을 자랑하고 ‘해설’에 침을 튀기기도 한다. 교양이나 시험용으로는 좋으나 여기 치명적 함정이 있다. 골륜탄조(<9DBB><5707>呑棗), 새가 대추를 통째로 삼키면 맛을 알 수 없듯이, 교과서와 백과사전에 갇힌 지식, 구호와 이데올로기로 변질된 사상은 소화불량을 일으키고, 심하면 병원으로 실려 가게 할 수도 있다. 독서는 이를테면 양파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고, 골수를 향해 들이미는 칼과 같다. “오늘 한 겹을 벗기고, 내일 한 겹을 더 벗길 뿐이다. 껍질을 다 벗겨야 비로소 살이 보이고, 살을 다 벗겨야 뼈가 보이며, 뼈를 깎아내야 골수가 보인다.”

우리 학문의 위기는 책을 보는 법에 철저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생경하고 소화되지 않은 개념들이, 맥락과 배경을 알 수 없는 이론들이, 현실적 적용을 본격 고민해 보지 않은 트렌드들이 종횡무진 중구난방하는 이 어지럽고 들뜬 풍경부터 걷어내야 하지 않을까. 그러자면 원론, 기초로 돌아가서 책을 ‘자세(仔細)’히 읽는 법부터 배우고 가르칠 일이다. 웬만한 정보와 기법은 네크워크로 공개된 시절이 되었다. 창조성은 깊이 읽는 연습, 아무도 닿지 않는 심연에서 피어 오르는 것은 아닐까.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전한학과 철학을 가르치고 있으며『주희에서 정약용으로』『조선유학의 거장들』 등을 썼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