깽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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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다른 사람이 모르게 저희끼리만 쓰는 암호 같은 말을 변말 또는 은어(隱語)라 한다. 자기 집단을 보호·존속시키려는 '집단어'라고도 할 수 있다.

선뜻 도적·창녀 집단을 연상하게 되지만 산삼 캐는 심마니나 궁중 사람들이 쓰던 독특한 용어들도 은어이긴 마찬가지다. 학생층은 예나 지금이나 은어의 대량 생산·유통지다. 프랑스어에서 빌려온 영어단어 '자곤(jargon·은어 또는 전문용어)'은 본래 범죄자들이 자신들의 대화를 남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고 쓰던 변말을 의미했다.

은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어 왔고 앞으로도 생성·소멸을 거듭할 것이다. 조선시대의 포졸들은 '아들'을 '욱이', '아비'를 '수어살이', '어미'는 '튀어살이'라고 불렀다. 영화 '조폭 마누라'에서 주인공이 '짭새''씨방새'라는 범죄집단의 은어를 뇌까리던 장면을 기억해보라.

은어가 풍기는 생생한 현장감과 주류사회에 대한 반항끼는 작가, 특히 리얼리즘 계열 소설가들의 시선을 끌었다. 황석영의 몇몇 소설을 들춰봐도 '똥치 같은 게 겉멋만 들어가지고'(섬섬옥수), '수세미 같은 뽁'(어둠의 자식들) 같은 비속한 은어 표현들이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

그러나 아무나 소설가 흉내를 내려 해선 곤란하다.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사흘 전 정당연설회에서 썼다는 '깽판'이란 말은 '방해하다'라는 뜻의 은어 '깽판 놀다'에서 나온 말이다. '깽판 놀다'는 본래 도적·소매치기·들치기·날치기·불량배 등 범죄집단이 자기들끼리 쓰는 은어였다. '깽'이 영어 '갱(gang·폭력단)'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깽판'은 또 '섰다' 도박판에서 4와 9가 나온 상황을 가리키는 도박꾼들의 은어이기도 하다. (국어변말사전·장태진 엮음)

비속한 은어는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인사가 쓸 말이 아니다. 더구나 말실수 한 것을 놓고 주변에서 후보를 위한답시고 "말꼬리 잡지 말고 전체 맥락을 보라"거나 "솔직담백하고 직설적인 어법"이라고 어쭙잖은 변명을 했다니 어이가 없다. 그날 연설회에 아이를 데리고 참석한 유권자도 있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청소년층을 포함한 많은 국민이 후보의 발언을 TV로 접하게 된다. 이미 해버린 말은 정중히 사과하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노재현 국제부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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