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대그룹 투자 편중 - 중복투자 재연 우려 주력 차별화 아쉬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본지와 현대경제연구원이 공동조사한 결과 삼성·LG·SK 등 7대그룹이 정보통신·금융·바이오에 경쟁적으로 진출하는 등 '투자 편중'이 심각한 것으로 조사됐다.

각 기업이 주력사업에 차별화하지 않고 '황금알을 낳는다'고 소문난 업종으로 몰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에따라 1980년대의 조선·중공업이나 90년대의 석유화학·반도체와 같은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즉 유행업종 과다진입→공급 과잉→기업 부실화→정부의 강제 구조조정 빌미를 제공하는 악순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의 유병규 미시경제실장은 "삼성·현대 등 국내 7대그룹의 경우 전체 경제규모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0% 이상으로 크다"며 "이들이 특정업종에만 집중적으로 몰리는 투자 행태는 국내 자원의 효율성 차원에서도 다시 한번 따져봐야 할 때"라고 말했다.

◇남이 하는 사업 따라하기 여전=이번 조사에 따르면 국내 주요 7대 그룹은 현재 건설·화학·유통물류·정보통신·금융 부문에 모두 진출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과거 30년 동안 경제 성장기를 맞아 대기업들이 돈되는 업종에 빠짐없이 진입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

그런데 대기업들은 향후 성장산업에서도 이와 비슷한 행태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7대그룹 가운데 자금난을 겪고 있는 현대만 투자를 유보한 채 멈칫하고 있을 뿐 나머지 업체들은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그러나 이들은 미래성장 3개 업종에만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있는 것이다.

삼성의 경우 올해 총 14조5천억원의 투자금액 중 80~90%(추정치)를 정보통신(반도체 포함)·바이오 등에 투입할 예정인 것으로 조사됐다.

삼성그룹 관계자는 "올해 시설투자에 6조5천억원, 연구개발(R&D)에 8조원 안팎을 투자하고 있다"면서 "이들의 대부분이 반도체·정보통신 분야에 집중될 것"이라고 말했다.

LG·SK·한화 등도 비슷한 추세다.LG는 올해 총재원 5조4천억원 가운데 정보통신(4조3천2백억원)과 바이오(8백억원) 두곳에만 90.7%를 투자할 예정이다.

SK도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사업구조를 모델로 삼고 정보통신·바이오에 승부를 걸고 있다.SK는 올해 총 투자 4조3천억원 가운데 정보통신(1조5천억원), 바이오·화학(1조원)에 절반 이상을 쏟아부을 계획이다.

SK는 특히 KT(옛 한국통신)의 대주주가 되기 위해 LG·삼성 등과 경합을 벌여 지분 11.34%를 확보하기 위한 총 1조9천억여원을 별도로 투자하기도 했다.

특히 주요 대기업들은 금융 부문을 향후 성장업종으로 크게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삼성의 경우 현재 금융 비중이 관련업계 전체 매출액의 24%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또 LG와 롯데가 금융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각각 10% 선이며, 현대 7%, SK 4%, 한진 2%,한화 1% 순이다.

따라서 이들 7대 그룹은 이미 금융업 전체의 절반이 넘는 58%를 점령한 셈이다. 한술 더떠 상대적으로 뒤처진 한화·SK·롯데 등은 향후 금융사업 확장에 총력을 기울일 방침이다.

한화는 사업구조를 현재 석유화학 중심에서 아예 금융·서비스로 변신을 선언했다. 한화는 올해 시설투자(4천5백억원)와는 별도로 대한생명 인수를 위한 유동성을 7천억~8천억원 가량 확보해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7대 그룹은 정보통신·바이오·금융 분야에 집중투자하는 것과는 달리 '아직까지 돈되지 않는' 미래산업 분야에는 투자가 인색하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7대 그룹 중 환경 분야에 적극적으로 진출한 업체는 아직까지 하나도 없다. 삼성만이 이 부문을 올해 신규산업 육성계획에 포함시켰을 뿐이다.

◇주력사업 특화로 승부해야=신규사업의 과다·중복 진출은 국가적으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더 많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기업간 치열한 생존싸움으로 관련산업이 경쟁력을 확보할 수도 있지만, 과거 사례를 보면 자칫 자원 낭비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업연구원의 김용열 기업정책실장은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들이 여윳돈을 많이 챙겨놨으나 마땅히 투자할 곳을 찾지 못하는 게 사실"이라며 "이렇다 보니 위험부담이 큰 차별화 사업보다는 안전하게 남들이 하는 산업에 따라가기가 성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유진수 숙명여대(경제학) 교수는 "바이오 산업의 경우 대규모 투자 부담이 매우 큰데도 비전이 있다고 무조건 너도나도 뛰어드는 것은 되레 위험을 키우는 것"이라며 "성장의 원천으로서 수익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현재의 주력사업을 중심으로 부가가치를 높이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를 우려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김석중 상무는 "돈되는 사업에 민간기업이 쏠리는 것은 당연하다"며 "시장의 자율 조정기능을 믿고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산업의 초기단계에 민간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진입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지적이다.

이같은 진입 과정에서 점차 기업간 우위가 결정되면 경쟁력 있는 업체가 합병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조정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김시래·김창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