빔 벤더스 감독 '밀리언달러 호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59면

'파리 텍사스''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등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독일 감독 빔 벤더스. U2의 멜랑콜리한 음악으로 시작되는 '밀리언달러 호텔'(2000년)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쓸쓸하면서도 아름답다.

'밀리언달러 호텔'은 '백만불짜리'라는 이름과 달리 몹시 쇠락한 삼류 호텔이다. 이 곳에는 소위 밑바닥 인생들이 모여산다. 대부분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지만 의료보험료를 낼 수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벤더스 감독은 정신의 결함이 곧 영혼의 미숙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감독의 따뜻한 시선은 저능아 청년 톰톰(제레미 데이비스)과 엘루이즈(밀라 요보비치)의 사랑에서 드러난다. 호텔에서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하는 톰톰은 아름다운 그녀에게 한눈에 반하지만 그의 구애 방법은 어색하기 짝이 없다.

엘루이즈는 과거의 상처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기묘한 처녀다. 두 사람은 톰톰의 방에서 창 너머를 바라보며 물이 종이에 스며들듯 조금씩 서로를 발견해나간다.

벤더스 감독은 호텔 사람들을 소개하는 방법으로 미스터리 형식을 빌려왔다.

마약 중독자이던 재벌 2세 이지가 호텔 옥상에서 추락사한 시체로 발견된다. FBI 요원 스키너(멜 깁슨)가 파견돼 의문사의 범인을 좇는다. 스키너의 탐문으로 드러나는 호텔 사람들의 면모는 각양각색이다.

자신이 비틀스의 다섯번째 멤버이며 비틀스의 웬만한 히트곡은 다 작곡했다고 주장하는 록가수 딕시(피터 스토매어), 이지가 죽기 전 약혼했다고 거짓말을 늘어놓는 비비안(아만다 플러머),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리는 인디언 제로니모(지미 스미츠) 등이 어두침침한 호텔의 분위기를 더욱 기묘하게 만든다.

사건은 진범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이지가 생전에 시꺼먼 타르로 그린 그림이 '재벌 2세인 예술가가 빈민가의 영혼을 그림에 담았다'며 매스컴의 조명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살인 사건으로 인한 이지의 인지도를 이용해 돈을 벌어보겠다는 호텔 사람들의 순진한 탐욕은 타르화가 사실 도난된 고가의 미술품을 위장하기 위한 것임이 드러나면서 덧없이 꺾인다.

'밀리언달러 호텔'에는 인상적인 장면이나 대사가 꽤 눈에 띈다. 영화 처음과 마지막에서 톰톰이 호텔의 옥상에서 낙하하며 "삶은 완벽하다. 삶은 최고다. 나는 뛰어내린 후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됐다"라고 읊조리는 장면은 사랑하는 여인과 영혼을 나눌 수 있었던 그의 삶이 결코 누추하지 않았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U2의 보노가 각본을 썼다. 밀리언달러 호텔은 실재하는 호텔이다. 1917년 문을 연 뒤 현재 '프론티어 호텔'로 이름이 바뀐 이 호텔은 과거 루스벨트·아이젠하워·트루먼 대통령이 묵었을 정도로 수준급의 호텔이었다고 전해진다. 오는 31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기선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