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곡의 삶서 희망 찾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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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오른 팔은 잘려 나가고 왼쪽 다리에는 의족을 한 중년여인이 목발을 짚고 서있다. 고통에 익숙해진 표정의 여인은 앞으로 계속될 힘겨운 삶 앞에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본다. 간신히 걸음마를 하는 아기가 엄마의 오른쪽 다리에 매달려 있다. 희망없는 삶속에서 간신히 쓰러지지 않고 버티는 어머니, 다리에 매달려 있는 아기. 갈색의 천을 꿰매서 만든 어머니와 아들의 형상을 표본수집용 유리관이 덮고 있다. 작가의 고통스러운 무의식 세계를 담은 인형들이지만 이제는 현실의 악몽이 아니라 표본으로서 전시돼 있다는 점이 변화다.

17일~6월 29일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리는 루이즈 부르주아(91)초대전에 출품된 '모자상'이다.

부르주아는 조각과 설치미술로 이름높은 20세기의 대표적인 여성미술가.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고 미국의 미술 월간지'아트뉴스'에서 '생존하는 세계 10대 미술작가'로 선정됐었다. 2000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억의 공간'이라는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해 국내 관객에게도 낯설지 않다.

호색가인 아버지와 인내심 강한 어머니, 성적으로 문란한 언니와 가학취미의 남동생 사이에서 자란 부르주아는 인간의 심성과 성에 대한 관심을 지속적으로 표현해온 페미니즘 작가.

"나는 조각을 통해 두려움을 다시 체험하고 그것에 물리적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무의식에 접근하는 것은 환상적인 특권이다"는 그는 욕망·쾌락·사랑·고통·소외를 상징적이고 충격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으로 이름높다.

이번 전시에는 '부부''모자상' 등 천을 손으로 기워 만든 섬유조각 14점과 드로잉 8점을 출품한다. 근작들에서 보이는 변화는 과거의 과격한 감정이 순화됐다는 점이다. "바느질은 곧 치유 행위를 상징하고 천 조각을 이어붙인 인체상은 화해와 통일, 회복을 뜻한다"고 말한다.'모자상'에서는 악몽을 객관화시켜 바라보고 있고,'부부'는 여전히 표정이 막막하지만 포옹하고 있는 것이다. 색동천으로 된 상자를 2m 높이로 쌓아 올린'무제'같은 추상 조각도 작품세계의 변화로서 눈길을 끈다. 02-735-8449.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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