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up] 휘슬러코리아 최혜숙 셰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경제 01면

“생계 걱정보다 실직자들을 더 괴롭히는 것은 사회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절망감입니다. 일어서려는 그들에게 조그만 발판을 만들어주면 큰 힘이 될 겁니다.”

독일 주방기구업체 휘슬러의 한국법인인 휘슬러코리아의 마케팅요리개발팀 최혜숙(36·사진) 수석셰프. 그는 24일 실직자 박신(55)씨와 함께 서울 정동 구세군 중앙회관 앞에서 4시간 동안 풀빵을 만들어 팔았다. “고객에게는 날씨 얘기도 물어보고, 눈을 직접 쳐다보며 대화를 건네세요. 한번 사러 온 고객들은 친절히 응대해 단골로 만드셔야 해요.” 처음엔 고객들과 눈도 못 맞추던 박씨는 최 셰프의 조언에 힘을 얻어 3시간쯤 뒤부턴 손님들과 농담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최 셰프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3월부터 박씨에게 풀빵 만드는 법과 고객 응대법을 한 번에 두 시간씩 무려 20여 차례 가르친 노력이 첫 결실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휘슬러코리아 최혜숙 수석셰프(오른쪽)가 24일 서울 정동 구세군회관 앞에서 빨강마차 프로젝트 1호 수혜자 박신씨와 함께 건강 풀빵을 만들어 팔고 있다. [휘슬러코리아 제공]

박씨는 ‘빨강마차 프로젝트’ 1호 수혜자다. 이 프로젝트는 실직자 중 재기 의지를 가진 이들에게 조리도구를 갖춘 이동점포인 빨강마차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최 셰프가 메뉴 개발과 실직자 교육을 맡고, 휘슬러코리아는 빨강마차를 제공하며, 구세군은 실직자 선정과 재료비 지원을 맡는다. 이날 하루 동안 판 풀빵은 20여만원어치. 비록 아주 큰 돈은 아니지만 박씨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최 셰프는 “직접 만든 풀빵을 판 돈이 한 푼 두 푼 쌓여 가자 박씨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환해졌다”며 “그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되살린 점이 뿌듯하다”고 말했다.

최 셰프의 직업은 5명의 요리사를 지휘하며 휘슬러 주방용구를 이용한 요리를 개발하고 주부들에게 전파하는 일. 그는 “내가 가진 노하우를 살려 실직자들에게 재기의 희망을 줄 수 있다는 말에 흔쾌히 프로젝트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빨강마차 메뉴의 테마는 건강이다. 밀가루 대신 쌀과 현미가루, 녹차가루와 클로렐라 등을 넣은 ‘건강 풀빵’이 대표 메뉴.

그는 “소수를 위한 요리가 아니라, 나눔을 실천하는 요리를 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며 “내가 개발한 메뉴에 대한 소비자들의 반응을 길거리에서 바로 볼 수 있다는 점도 흥분된다”고 말했다.

박씨는 잘나가는 중견기업 간부로 일하다 외환위기 때 실직하고, 10여 년간 공공·희망근로로 생계를 이어왔다. 그래도 받은 돈 가운데 70%를 꾸준히 저축하며 재기를 꿈꿔 왔다. 최 셰프는 박씨를 석 달 동안 교육하면서 실직자들의 마음고생을 실감하게 됐다고 한다. 처음엔 질문도 거의 안 하던 박씨가 교육이 거듭될수록 마음을 열었다. 최 셰프는 “실직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적 여건상 노력만으론 그 처지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이 안타깝다”며 “이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절실하고, 일회성 시혜가 아닌 자립 수단을 마련해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최 셰프는 올해 안에 이미 선발된 10명에게 빨강마차 교육을 마치고, 2012년까지는 100명의 빨강마차 운영자를 키워내는 게 목표다. 휘슬러코리아 대리점 사장단이 구세군에 10개 계좌를 기부해 마차 10대를 이미 마련해 놓았다.

최 셰프는 “여름과 가을에 어울리는 메뉴도 추가로 개발할 계획”이라며 “인삼 스무디·홍삼차·흑마늘 주스 같이 약간은 비싸도 몸에 좋고, 실직자 분들의 재기에도 도움이 되는 특화된 메뉴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빨강마차를 지원하길 원하는 기업이나 일반인은 구세군 또는 휘슬러코리아(02-3416-9723)로 문의하면 된다.

최지영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