英'그들만의 월드컵' & 홍콩'소림 축구' 스크린에도 축구 열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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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힘차게 날아가는 축구공의 기세에 초록색 그라운드가 파이고 촘촘한 골망도 간단하게 찢어진다. 뿐만 아니다. 선수들은 수직 이륙 비행기처럼 하늘로 솟구친다. 골키퍼가 공중제비를 돌며 상대편의 강슛을 걷어차는 건 기본이다. 현실에선 불가능한 축구의 진기·명기가 스크린에 펼쳐진다. 영화보다 만화에 가까운 장면들이다. 객석에선 연신 깔깔 웃음이 터진다.

20여일 앞으로 바짝 다가온 2002 한·일 월드컵. 극장가에도 월드컵을 겨냥한 '기획상품' 두 편이 찾아온다. 10,17일에 각각 개봉하는 영국 영화 '그들만의 월드컵'(베리 스콜닉 감독·15세 이상 관람가)과 홍콩 영화 '소림 축구'(저우싱츠 감독·전체 관람가)가 그것이다.

사실 이들 작품은 월드컵과 별다른 관련이 없다. 3백60도 빙글빙글 도는 축구공을 소재로 한 영화임엔 분명하지만 작품의 중심엔 진득한 인간애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밑바닥 인생'들이 축구를 통해 삶의 용기를 되찾는다는 공통점도 있다. "우울하고 답답한 현실, 꽉 막힌 것 같은 인생을 축구공에 실어 날려보내자"고 말하려는 것 같다.

두 영화는 코미디다. 그것도 과장된 액션으로 무장한 폭소성 코미디다. 그럼에도 경박한 느낌은 주지 않는다. 삶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지며 앞날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까닭이다. 처음엔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선수들이 일정 기간의 훈련을 통해 기량이 성장해가는 모습은 애틋한 휴먼 드라마마저 연상시킨다.

중간 중간 비약이 심하고, 구조 자체가 치밀한 두뇌놀림이 필요할 만큼 정교하진 않지만 두 작품 모두 막바지에 깜찍한 장면을 준비해 놓는 등 보는 이를 끝까지 실망시키지 않는 미덕을 갖추고 있다. 아이디어도 신선한 편이다. '그들만의 월드컵'은 교도소를 배경으로 죄수와 간수 간의 축구 경기를 보여주고, '소림 축구'는 중국 전통무술인 소림권법과 축구 기술을 결합한다.

죄수팀 vs 간수팀 한판 승부

'그들만의 월드컵'은 지난해 개봉한 한국 영화 '교도소 월드컵'(방성웅 감독)과 닮았다. 하지만 허술한 구조로 헛웃음만 유발했던 '교도소 월드컵'과 달리 '그들만의 월드컵'은 짜임새가 단단하다. 영국 프로축구 리그에서 직접 뛰었던 비니 존스 등 실제 선수들이 출연해 만만찮은 축구 실력을 선보인다.

'인간 병기'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한때 최고의 인기와 부를 누렸던 영국 국가대표 선수 대니(비니 존스). 승부조작 사건으로 현역에서 '불명예 제대'를 한 그는 술을 먹고 경관을 폭행해 교도소에 수감된다. 그리고 죄수 축구단의 감독 겸 주전선수로 '부활'해 콧대 높은 간수들과 한판 승부를 벌인다.

영화의 얼개는 크게 두가지다. 스타로서의 중압감에 시달렸던 대니의 좌절과 방황, 그리고 자아회복이 첫째요, 죄수와 간수란 대척점에 선 인물들이 드러내는 권력 관계 해부가 둘째다. 도박 축구를 이용해 목돈을 만지려는 부패한 교도소장, 원리원칙에 충실하려는 선임 간수, 중죄는 지었으나 자존심만은 포기하지 않으려는 죄수들은 교도소 밖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반칙이 난무하는 경기장 풍경도 결국 보통 사람들의 번잡한 일상을 풍자하는 듯하다.

만화적 상상력 그라운드 달궈

홍콩 코미디계의 황제로 불리는 저우싱츠(周星馳)가 감독·주연·각본을 도맡은 '소림축구'는 홍콩판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시종일관 현란한 컴퓨터 그래픽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선수들의 강슛에 그라운드엔 일진광풍이 일어나고, 축구공에선 불이 지글지글 타오르는 등 만화적 상상력이 가득하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매트릭스'등 할리우드 흥행작을 패러디한 장면도 즐겁다.

저우싱츠는 이런 볼거리 속에 3류 인생의 재기담을 녹여놓았다. 오락과 감동이란 두마리 토끼 잡기에 나서는 것. 한때 소림사에서 무공을 함께 연마했으나 지금은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고 있는 일당들이 축구단을 구성해 정상에 등극하는 과정을 시쳇말로 유쾌·통쾌·상쾌하게 그려낸다.

이현세 원작의 야구 영화 '공포의 외인구단'을 연상시키나 '소림축구'는 '공포의 외인구단'의 비장감 대신 철두철미 가벼운 폭소로 작품을 포장한다. 소외계층의 남루한 삶을 지속적으로 반영해온 '희극지왕' 저우싱츠의 개성이 여전한 것이다.

두 영화에서 축구장은 전쟁터다. 사회적 약자의 해방구 비슷하게 제시된다. 그것이 비록 과장된 감동, 거짓된 희망이라 할지라도 모순투성이인 인생사를 비틀어보자는 코미디 정신만큼은 흔들림이 없다. 기상천외한 축구경기도 덤으로 보여주고 있으니, 이런 게 '당의정(糖衣錠) 영화'가 아닐까 싶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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