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스트라이커 황선홍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5일 오전 서귀포 강창학 경기장의 자욱한 안개 사이로 황선홍(34·가시와 레이솔)의 모습이 보였다. 어깨 부상으로 개인 체력 훈련만을 해온 그로서는 약 2주 만에 연습 경기에 합류한 것이다. 어딘가 몸을 사리는 듯했고 1백% 전력을 다하는 것 같진 않았다. 몸싸움도 가능한한 자제했다.

그러나 6대6 미니 게임에서 찬스가 나면 감각적으로 골을 터뜨리는 모습에선 "역시 황선홍"이란 찬사가 터져나왔다.

황선홍 회복을 위해 물리치료사 아노를 전담으로까지 붙였던 히딩크 감독은 이날 "재활 훈련에 잘 따라주고 있다. 동료들과 함께 하지 않을 뿐 그의 개인 훈련 강도는 다른 선수들보다 더 세다"며 회복속도에 만족감을 표시했다.

황선홍도 "연습 경기에 나서면 자연스레 몸을 부딪치는 일이 잦아져 혹시 부상이 재발될까 조심스럽지만 현재로선 정상 컨디션에 80% 정도 돌아온 상태"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마음이 편치 않다. 서귀포 훈련에 돌입한 다음날인 지난 3일 할아버지(황도성씨·83)의 부음을 접했다. 1996년 아버지를 여읜 그에게 할아버지는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서귀포에 오기 전날인 1일에도 병원에 찾아가 뵈었어요.'바쁜데 왜 여기까지 왔느냐. 월드컵엔 잘 해야지'라며 다독여주셨죠. 오늘이 발인인데 빈소도 못가보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벌써 30대 중반. 어느덧 4회 연속 월드컵에 출전하게 된다. 88년 건국대 2학년 시절 첫 태극마크를 단 이후 14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한국 대표팀에서 가장 믿을 만한 '킬러'로 황선홍을 떠올린다.

"황선홍을 보면 스트라이커는 타고난다고밖에 할 말이 없다. 위치 선정과 골문 앞에서의 침착성은 가르친다고 되는 게 아니다"는 정종덕 전 건국대 감독(현 SBS 해설위원)의 말처럼 그는 천부적 재질에 오랜 경력이 덧씌워지며 이제 완숙의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황선홍만큼 월드컵과 인연이 없는 선수도 없다. 세차례 월드컵 출전에서 그가 기록한 골은 단 하나.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큰 법. 오죽하면 98년 프랑스 월드컵 직후 PC통신에 '단군 이래 이완용과 함께 최고 매국노는 황선홍'이라는 황당한 글이 오르기까지 했을까.

그런 만큼 그가 이번 월드컵에 임하는 자세는 비장하다. 부인 정지원(31)씨는 "단지 마지막 월드컵이라는 의미만은 아닌 것 같아요. 애기 아빠는 '이번에 어떤 결과를 보이느냐에 따라 내 25년 축구 인생의 평가가 좌우될 것'이라고 얘기하곤 해요"라고 전했다.

'비운의 스타'로 그칠지,'한국의 첫 16강을 견인한 황새'로 떠오를지 그의 운명을 건 승부수에 한국 축구도 명운을 함께 걸고 있다.

서귀포=최민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