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 속 장애친구 돕는 어린천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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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오늘은 할머니가 무릎이 아프시다고 한다. 나를 돌보다가 아프신 것같아 속상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꼭 할머니 무릎을 치료해 드려야지."

전남 여수의 관기초등학교 6학년 윤수정(尹秀貞·12)양이 쓴 효행일기의 일부분이다. 효행일기란 이 학교 학생들이 그날그날 부모님께 한 효행을 적는 일기.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수정이의 효행일기장에는 엄마·아빠 대신 할아버지·할머니가 등장했다.

여수시내에서 보석상을 하던 아버지(43)는 수정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그만 부도를 내버렸다. 그 뒤 수정이의 부모는 할아버지·할머니가 사는 여수시 소라면 관기리 원죽마을에 수정이를 남겨두고 돈을 벌러 떠났다.

"처음에는 엄마·아빠가 보고싶어 매일 울었어요."

그러나 수정이는 슬픔을 삭이고 할아버지·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기특한 손녀로 자랐다.

할머니가 편찮을 때 하루종일 집에서 할머니를 간호한 일,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장마철에 할머니와 함께 비를 흠뻑 맞으며 고구마밭에서 일한 일, 눈이 나빠진 할머니를 위해 설거지 등 집안일을 도와드린 일 등이 차곡차곡 효행일기에 쌓여갔다.

2000년부터는 또 다른 일거리를 스스로 만들었다. 한달에 두번씩 학교 근처에 있는 장애인 복지시설 '동백원'을 찾아 장애인 친구들의 말동무가 돼주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동백원의 친구·언니들과 함께 하다보면 건강한 몸으로 친구들과 뛰어놀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담임인 박태성(朴太成·53)교사는 "수정이는 어려운 가정형편에서도 항상 밝은 미소에 성적도 좋다"며 "따돌림당하는 친구가 있으면 다른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등 전교 회장의 역할도 잘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수정이는 지난 3일 큰 상을 받았다.

80회 어린이날을 맞아 보건복지부가 주는 모범어린이상을 수상한 것이다.

부모님도 이제는 사업 실패의 충격을 딛고 일어나 수정이를 데리고 여수시내에서 같이 살 수 있을 만한 형편이 됐다.

그러나 수정이는 "제가 떠나면 할아버지·할머니가 너무 외로워하실 것같다"며 원죽마을에 남기를 고집하고 있다.

윤혜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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