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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쌍이 社內 부부 "회사가 집 같아요"-충남 천안 MEMC 코리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5면

#깃발을 잡다

지난달 26일 결혼 4주년을 맞은 사내 부부가 회사 인근 식당에 직장 동료들을 초청해 첫 아이 돌잔치를 겸한 자축연을 조촐하게 열었다.

황선준(黃善準·31·남)·최지숙(崔智淑·28)씨 부부. 의례적인 수준을 넘는 축하가 쏟아졌다. 사내 결혼의 원조급(?)이면서 첫 아이는 늦은 편이어서 더욱 그랬다.

黃씨 부부가 처음 만난 것은 1997년. 당시 黃씨는 갓 입사한 새내기였고 崔씨는 입사 6년차에 4개 작업반 40여명을 지휘하는 주임이었다.

전문대와 군대를 마치고 입사한 黃씨는 "왕고참 崔주임에게 첫눈에 반했지만 사이 좋은 선후배 관계를 넘어설 용기까지는 감히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곧바로 회사에 찬바람이 몰아쳤다. 외환위기가 찾아온 것. 주변 회사들이 감원·명예퇴직으로 어수선했다. 엠이엠씨는 3조(組) 3교대를 4조 4교대로 늘리는 등 모두가 사는 방법을 택했다.

월급은 줄었지만 서로를 감싸안는 분위기는 바깥 찬바람이 거셀수록 도타워졌다. 그런 분위기가 이들을 점점 더 가깝게 맺어줬다. 밀회의 횟수가 쌓여 98년 3월 결혼을 발표했다. 모두가 놀랐다.

이들의 '사랑 선언'이 엠이엠씨 사내 결혼의 기폭제가 됐다. 결혼 적령기를 맞은 崔씨의 여자 입사(92년) 동기들을 중심으로 잇따라 결혼을 발표했다. 결국 그해 24쌍의 사내 부부가 탄생했다. 崔씨의 입사 동기 가운데서만 21명이 사내 결혼을 했다.

#집안 같은 직장

장인군(張仁郡·31)-배은미(裵銀美·28)씨 부부는 웨이퍼 생산라인의 같은 조. 남편 張씨가 야간대학(천안외국어대 컴퓨터정보학과)에 나가는 시간 외에는 온종일 얼굴을 마주보며 살아가고 있다. 92년 입사한 裵씨는 남편보다 회사 4년 선배로 현재 조장(組長)이다. 연봉도 남편보다 수백만원 많다. 드물게는 裵조장이 직장에서 부하인 남편을 혼내기도 한다. 귀가해 풀어버리므로 뒤탈은 없다.

하지만 아주 높은 상사 앞이 아닐 때는 "우리 신랑" "우리 와이프"라고 지칭해도 별 흠을 잡히지 않는다. 같은 처지의 동료들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張씨는 "생활 공간이 같다 보니 무심결에 집에서처럼 '은미야'라고 부르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가정 문제로 긴급히 의논할 일이 생기면 상대방을 코앞에 두고도 전화기 신세를 진다.

굳이 사내 예우를 따지자면 '하급자의 배우자로서가 아니라 상사의 동반자'로 대접해주는 게 이 회사의 불문율이라는 귀띔이다.

#007 작전

이 회사에서도 사내 연애는 아직 "까딱했다 혼삿길이 막힐 수도 있는" 도박으로 인식되고 있다.

張-裵씨 부부의 연애 시절 데이트도 철저히 '007식'이었다. 입방아에 오를까봐, 넓지 않은 천안에서 영화관 한번 마음 편하게 함께 가기 힘들었다. 천안에서 하나뿐인 백화점에서 회사 동료와 맞닥뜨렸을 때는 裵씨를 뒤따르던 張씨가 순식간에 잠적, 휴대전화 없던 시절이라 1시간여 동안 찾아 헤매기도 했다.

사내 연애의 애환은 이 회사의 신발함이 대변해 준다. 미혼 커플들간에 남몰래 쪽지 편지나 선물을 주고받는 우체통으로 애용되고 있는 신발함. 그러나 밸런타인 데이, 화이트 데이 때 몰래 초콜릿을 넣으려다 들킨 사례가 종종 있다.

'딱 걸렸네'쯤 돼도 순순히 시인하는 법이 없다. 이미 사내에 소문난 커플의 남자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남녀관계는 일분일초 후를 장담할 수 없다. 잘못될 경우 특히 여자에겐 치명타가 될 수 있다"며 거부했다.

#단맛 쓴맛

사내 부부들에겐 경조사비가 "되로 나가고 말로 들어온다."

직장 동료들의 애경사(哀慶事) 땐 부부 일심동체라는 구호 아래 봉투 하나로 부조를 때우지만 받을 때는 회사는 물론 동료들에게서 각자 봉투를 챙기는 재미가 쏠쏠하다는 것.

또 성과급 및 연말 특별 선물 지급 때마다 "결혼 잘했네" 합창이다.

지난해 張-裵씨 부부는 두사람의 성과급으로 몇 년째 미뤄왔던 새 승용차 구입을 일시불로 할 수 있었다. 다른 직원들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김치냉장고·대형 텔레비전 등 연말 가전 제품 선물을 고를 때도 택일(擇一)의 고민이 없다. 두 개 고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단점도 있다. 남편들은 이구동성 "집사람이 수당은 물론 업무까지 꿰뚫고 있어 비자금 조성은 커녕 맨몸 몰래 빠져나갈 틈도 없다"는 비명이었다. 부인들은 그보다 "누구 마누라가 어떠니 하는 소문이 돌까봐 일거수 일투족이 조심스럽다"는 점을 꼽았다.

부부싸움도 맘대로 할 수 없다. 둘 중 한명만 얼굴 표정이 이상해도 금세 동료들로부터 "어제 싸웠느냐"는 질문이 날아온다. 이럴 땐 회사 임직원 모두가 쌍심지 켠 시댁 식구요 처갓집 가족처럼 느껴진다.

천안=조한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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