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생때 책벌레들 정작 청소년기엔 참고서만 봐야하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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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9면

지난주에 중학교 2학년 고객 한길이가 『시튼 동물기』(논장) 완역본을 사갔다. 몇달 전만 해도 만나기만 하면 『반지의 제왕』(황금가지)과 톨킨, 그리고 룬문자와 문양에 대해 이야기하던 아이였다.

한길이와 내가 처음 만난 건 그 애가 초등학교 3학년 때다. 엄마와 함께 책방 나들이를 다니던 한길이는 어느 때부터인가 버스를 타고 혼자서 책방에 드나들었다. 고생물학자가 되겠다며 공룡책이란 공룡책은 모조리 섭렵하더니 그 다음에는 우리나라 역사와 중국 역사 책을 가리지 않고 보았다.

고생물학자의 꿈은 포기했나 하고 알아보았더니 우리 역사책을 볼 땐 장보고 게임이 유행이었고, 중국 역사책을 볼 땐 삼국지 게임이 유행이었다. 그러니까 게임을 하다가 그 게임의 배경이 된 책들까지 닥치는대로 읽기 시작한 것이다.

사람들에게 가끔 이 재미있는 아이를 자랑하곤 한다. 이제 발길이 뜸한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청소년 코너를 만들어야겠다고 너스레를 떨면서. 아침에 문을 열려고 할 때 와서 저녁에 문을 닫을 때 돌아간 기록을 세운 아이라고, 점심을 도시락으로 해결하고 책을 읽던 아이라고, 중학생이 돼서도 어린이서점을 찾던 아이라고….

이런 아이를 자주 만나고 싶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저학년 때까지 열심히 그림책도 보고 동화책도 보던 아이들이 고학년이 되면 책과 멀어진다. 책과 멀어지게 하는 환경을 탓하는 게 타당할 듯싶다. 학과 공부도 해야 하고, 여기저기 학원도 다녀야 하고…. 책 읽을 시간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저학년 때까지 책에 관심을 보이던 부모들도 고학년이 되면 현실을 좇게 된다. 책을 고르더라도 학습관련 책으로, 지식 정보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다. 창작물은 여기저기서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추천하는 책만 겨우 고른다. 책 읽는 맛을 알고, 그것을 토대로 논리적인 사고가 싹트고 나름대로 판단해 자기것으로 받아들이고 버리고 할 때에 정작 책을 멀리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우리 동네엔 헌책방이 하나 있었다. 주인아저씨 눈치를 보며 책을 읽곤 했다. 하루는 "너 새 전과 있지? 그거 가져오면 헌책 다섯 권 줄게"하는 주인아저씨의 꼬드김에 엊그제 새로 산 전과를 갖다주고 『떠돌이 고아 라스무스』(지금은 비룡소·시공주니어 등에서 『라스무스와 방랑자』로 출간돼 있다)를 포함해 헌책 다섯 권을 얻었다.

가만히 앉아서 양부모가 나타나길 기다리기보다 스스로 양부모를 찾아봐야겠다며 길을 떠나는 라스무스 이야기, 그리고 자유와 정의와 도전과 모험을 이야기하던 책들, 그들은 모두 아주 훌륭한 성장모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초등학교 5학년인 아리는 "『행복한 청소부』(풀빛) 같은 청소부가 될 거예요"하고 속삭인다. 당장 학교 공부와 관계가 없더라도 언제까지나 함께 할 친구로 스승으로 책을 받아들이면 안될까?

<어린이전문서점 '동화나라'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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