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 뉴스'방송할 때도 한 옥타브 낮춰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세계적인 미디어 사상가 마셜 맥루한은 미디어를 제작 정밀도와 수용자 참여도에 기초해 핫(hot)타입과 쿨(cool)타입으로 분류한다. 라디오는 핫 미디어고 텔레비전은 쿨 미디어다.

이를 재해석하면 텔레비전은 '핫' 뉴스를 다루기에 부적합하고, 따라서 뜨거운 선동과 선전에는 적합치 않다는 의미다.

그가 텔레비전에 대해 흥분하지 말고 한 나라를 차분하게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주문한 것은 이 때문이다. 만약 히틀러가 텔레비전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더라면 그의 선전·선동은 실패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우리의 경우 선거철에 걸맞게 각 당의 대선후보들이 선동·선전의 연설에 몰입하고 있는 듯하다. 선거인단에게 목청을 높여 자신의 지지를 호소하고, 자신의 이념을 주입하려 노력하고 있는 게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정책과 공약을 가지고 차분히 설득하기보다 웅변식의 고함에 가까운 연설로 청중을 사로잡는 데 몰두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 텔레비전들은 대선 후보들의 이같은 모습과 연설을 편집해 방송하고 있다. 구태의연한 대응이라 할 수밖에 없다. 흐름과 변화를 선도해야 할 미디어로서 책무를 망각한 처사로 간주해도 무방할 것이다. 상당수 시청자들이 이를 '정치 공해' '음성 공해'라고 비판하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국 정치인들의 연설은 유난히 고음이다. 과거 극우인 히틀러나 극좌인 스탈린의 정치 연설 역시 선정·선동적인 데다 특히 고음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서구 사람들은 이같은 스타일의 정치연설을 외면하는 추세다.

지난해 9월 11일 뉴욕과 워싱턴 테러 당시 ABC 방송의 피터 제닝스, CBS 방송의 댄 래더 등 미국의 유명 앵커들이 아주 차분하게 뉴스를 진행하면서 객관적인 자세를 지키려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도 의미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한국 TV 앵커나 기자들의 경우 옥타브가 좀 높다. 생리학적 음성의 높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 표현의 강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책으로 한국인을 비판한 이케하라 마모루를 포함한 많은 외국인들은 한국 텔레비전들이 감정에 휩쓸려 흥분한 채 뉴스 보도를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텔레비전의 경우 앵커가 뉴스 가치나 기사 판단에 전권을 행사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 또한 한국은 아직도 방송이 정치권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다. 특히 방송계 주요 인사가 정치력에 휘둘린다는 지적에는 입을 다물어야 할 뿐이다.

사정이 이런지라 우리나라에선 방송인이 미국의 월터 크롱카이트나 데이비드 브링클리처럼 평생 언론 외길을 걸으면서 전문성과 경륜을 쌓아가기가 어렵다.

우리의 앵커나 방송 기자들이 정계에 진출하는 사례가 흔한 것도 우선 옥타브 면에서 정치인의 그것과 맞아떨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올해는 월드컵 축구대회와 아시안 게임, 지방선거와 대통령 선거 등 대형 국내외 행사가 펼쳐지게 된다.

이같은 중요한 시기에 방송이 현란한 수사나 흥분을 줄이고,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를 앞세우는 쿨 미디어의 역할을 수행해 가길 기대해 본다. 역시 한 옥타브를 내리는 것이 선결 과제다.

미디어 전문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