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호텔서 쫓겨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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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어려운 처지에 몰릴 때 우리가 늘어놓는 푸념에는 여러 가지 스타일이 있다. 그 가운데 흔한 표현이 "돈 떨어졌지, 배는 고프지, 갈 길은 멀지, 애는 울지…"하는 식이다. 크건 작건 이중삼중으로 겹친 곤경을 나열하고 꼬인 인생을 풍자하면서 오늘을 이겨내는 우리의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하룻밤 묵자니 번번이 퇴짜

어느 금요일 저녁 강원도 여행을 떠났다. 주말 교통체증으로 서울을 빠져 나가는 시간이 꽤 길어진 데다 피로도 겹쳐 그만 졸음운전이 반복됐다. 옆 좌석의 아내가 큰일 나겠다 싶었던지 아무데서나 하룻밤 묵자고 했다. 양평 입구에서부터 여관이나 그 비슷한 간판을 찾았다. 몇백m 간격으로 서있는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모텔들은 처음부터 숙박 대상에서 제외됐다. 중년의 부부가 들어가기엔 너무 멋쩍고 도대체 환영받을 리도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여관 찾기는 허사였다. 강 불빛을 배경으로 한 모텔의 세계만이 존재했다.

밤 11시가 넘어가면서 여관 찾기를 단념했다. "아무러면 어떠냐"하는 심정으로 눈 앞에 있는 모텔 문을 열었다. 종업원은 우리가 채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방이 다 찼노라고 했다.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고 다른 모텔을 찾아나섰다. 주차장에 5~6대의 승용차만이 눈에 띄어 빈방이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우리는 또 냉대를 받았다. 엉겁결에 '따블' 요금을 지불하겠다고 했으나 이마저 거절당했다. 화도 나고 부끄럽고 민망스러운 생각에 되돌아 나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차라리 길가에 주차하고 차 안에서 새우잠이나 잘까 궁리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젊었을 때의 일이지 하고 다시 마음을 고쳐잡고 세번째 모텔 문을 두드렸으나 역시 찬밥 신세였다. 다행히 이 모텔의 종업원은 우리 신세를 동정한 나머지 그 지역에 없다던 '여관'을 소개해 주었다. 강변 숲속의 '장미의 x'라는 간판을 찾으라고 했다. 너무나 러브호텔적인 상호였지만 그러나 마다하지 않았다. 우리에게 배당된 방의 원형 더블침대는 매우 섹시하게 꾸며졌지만 아무 감동도 주지 못했다. 창밖에 보이는 남한강의 별빛은 어떤 낭만도 아니었다. 초라하고 분하고 울적한 생각에 잠못 이루는 밤이었을 뿐이다.

택시 승차를 거부당하면 운전사를 신고해 처벌을 요구할 수 있다. 그러나 숙박업소에 대해서는 그런 조치가 불가능하다. 3년 전 규제개혁의 일환으로 공중위생법이 개정돼 업주가 투숙 손님을 받을 것인지 여부를 자율적으로 결정한다. 그러다 보니 회전율이 빠른 젊은이들의 러브호텔 숙박은 환영받고 하룻밤 묵길 원하는 중년들은 아예 내몰리고 있다. 도대체 이건 요금의 문제가 아니다. 여관은 점차 사라지고 러브호텔 영업만이 극성이다. 도시는 도시라서 그렇고, 관광지는 관광지라고 해서 또 그렇다. 결국 한물 간 세대들은 호텔이나 지역 주민만이 알 수 있는 산골짜기와 뒷골목의 여관을 찾아나서는 수밖에 없다.

월드컵 경기가 치러지는 10개 도시의 러브호텔들이 많은 외국 관광객을 수용하기 위해 월드인이라는 근사한 이름으로 바뀌었다. 몇가지 세제 혜택이 주어지지만 일부 업소는 그래도 러브호텔식 영업을 고집하며 월드인 지정을 거부하고 있다.

'월드컵 숙박' 잘될지 걱정

친구들끼리 몰려온 외국 관광객들은 월드인의 현란한 네온사인과 포르노 비디오가 비치된 현관, 더블베드에 이불 한채만 덜렁 놓여진 방의 풍경에 당혹스러워 할 것이다. 러브호텔들이 항상 뜨거운 차를 마시는 중국 관광객에게 보온병을 마련해 줄 수 있을까, 주변식당에서는 아침식사로 해장국이나 설렁탕 대신 토스트나 모닝 커피를 서비스할 수 있을까 걱정이 태산이다. 러브호텔이 중년 세대를 쫓아내듯 외국 관광객을 냉대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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