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에잇, 식물만도 못한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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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자연 속에서도 멋들어지게 자라난 나무들을 가끔 보게 되는데 그럴 때면 잘난 인간을 보는 것처럼 찬탄의 신음이 절로 나온다. 물론 사람이 그렇듯 못난 나무가 더 많다. 식물들도 나름대로의 운을 타고 나는 것인지 어떤 나무들은 너무나 볼품없이 멋대로 자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줄기의 한 곳에서 빙 둘러가며 가지를 뻗은 모습은 보기에 아주 흉하다. 분재에서 감상자의 눈을 찌르듯이 앞쪽으로 뻗어 나온 가지는 시각적으로 감내하기가 힘드니 무조건 쳐줘야만 한다. ‘버려야 얻는다’는 세상만사에 두루 통하는 이치다.

옛 절집을 다니다 보면 크게 휘어진 기둥 같은 것을 보게 된다. 우리 자연 속에는 곧게 자란 나무보다는 비틀어지고 휜 나무들이 훨씬 많으니 그 나무를 그대로 가져다 건축에 사용한 것이다. 식물학자들 말을 들어보면 일본 나무들이 쭉쭉 뻗어 나간 데 비해 한국 나무들이 한쪽으로 틀어져 꼬인 까닭은 강우량이 상대적으로 적어 수분이 부족해서라고 한다. 우리 조상은 현실을 받아들여 손에 넣을 수 있는 나무를 어여삐 여기며 그 모양새를 살려서 집을 지었다는 얘기다. 혹자는 지나친 인공을 배제하고 자연과 친화하고자 했던 선조의 정서가 배어든 예라 해석하기도 하지만 ‘꿈보다 해몽’이라 할 것이다. 냉혹한 현실을 비켜간 예술은 없다. 비슷한 예로 우리의 전통 정원 가운데 일품은 차경(借景)에서 나온다고 했다. 그러니까 인공적인 조경이 아니라 자연을 그대로 빌리는, 자연과 동화되는 정원을 말한다. 이 또한 자연에 기대 살 수밖에 없었던 조상의 지혜를 방증하는 문화다.

문명은 어차피 인공이며 자연에 대한 인류의 지배에 근거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스스로 소외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인류의 미래는 암담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찍이 사람들은 ‘지속 가능한’이라는 단서를 단 발전의 방향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던 것 아닌가. 인류가 만들어낸 문명은 위대하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인류는 자신이 버티고 선 토대를 스스로 깎아내고 허무는 것을 당연히 여길 만큼 어리석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의 미래는 어떤 점에서 늘 위태로워 보인다.

집의 베란다에는 분재라고 할 것도 없는, 야생화 식물원에서 기념으로 사온 작은 다래나무도 한 그루 있다. 이 조그만 나무는 봄에 새잎을 낼 때 보면 마치 초록빛 불꽃을 뿜는 것 같아 너무도 아름답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은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이 조그맣고 여린 나무에 초록색 꽃불 같았던 이파리가 어쩌면 그리 무지막지하게 크게 자라는지. 색깔도 허옇게 떠서 너무나 보기가 싫었다. 그런 녀석에게 물을 줄 때마다 “참으로 추하다”고 홀로 뇌까리곤 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어느 여름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다래나무는 그 추한 이파리들을 한순간에 스스로 죄다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다시 새로운 이파리들을 꽃불처럼 내보냈다. 이 새로운 이파리들은 줄기 크기에 마침한 정도로만 자랐고 색깔도 생생한 초록빛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정말로 경이로운 변신이었다.

아마도 이 나무는 꺾꽂이 방식으로 독립적인 삶을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기가 여전히 큰 다래나무의 가지인 줄 알고 커다란 이파리를 만들어 온 것인데, 어느 순간 ‘이건 아니다’라는 자각을 한 셈이다. 물론 다래나무가 ‘참으로 추하다’라는 뇌까림을 들었다고 생각한다. 식물이 보여준 그 놀라운 반향에 진정 감격하지 않을 수 없다.

‘에잇, 식물만도 못한 것!’ 앞으로는 스스로 이렇게 타박해 볼까나. 베란다의 다래나무조차도 마음의 소리를 알아듣는데, 아니 최소한 자기 꼴이 어떤지 결국 자각하고 마는데 말이다. 제 꼬락서니를 모르는 이, 인간이 으뜸 아닐까 생각게 하는 다래나무다.

정재숙 문화스포츠부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