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권영빈 칼럼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 일본 지식인들은 공산당 가입을 둘러싼 사상적 열병을 앓는다. 입당.검거.전향 그리고 폭로로 점철되는 색깔논쟁에 일본 지식인 사회도 시달렸다. 시인 김지하 구명운동에 앞장섰던 철학자 쓰루미 슌수케(鶴見俊輔)는 1976년에 와서야 '전향(轉向) 공동연구'를 제안한다.

전향. 이 말은 사법당국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에 개인의 사상을 꿰맞춘다는 점에서 불쾌한 용어다. 권력과 개인의 관계에서 보면 전향은 곧 굴복이다. 그러나 개인의 자발성이란 게 있다. 사상 또는 심경의 자연스러운 변화, 성장, 성숙을 뜻하는 다른 측면이 있다. 또 일본 전후 시기 많은 전향자가 나왔지만 학문적 대상으로 삼기엔 자료 자체가 빈약하고 쌍방 입장을 동시에 추구해야 할 어려움이 있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공동연구를 해보자.

*** 사상의 미궁에 또 빠지지 말아야

지난 과거를 들추는 작업이 무의미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위선적인 일본사상사를 벗어나 앞선 주자들이 달려간 전향 곡선을 다시 한번 좇으면서 전 시대의 전향 체험을 통해 사상의 미궁에 다시는 빠져들지 않기 위해 전향 공동연구를 하자는 게 쓰루미 슌수케의 발의였다.

나는 이철우 의원을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 다만 그가 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과 연루돼 4년형을 받고 사면.복권되어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사람이란 정도만 알고 있다. 이런 그가 다시 조선노동당 입당과 간첩 암약이라는 야당의원의 고발로 국회가 공전되고 다시 지겨운 색깔논쟁의 한복판에 서 있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되는가. 어두운 역사 때문이라고 본다. 일제강점기의 어둡고 긴 세월 속에서 친일과 반일, 6.25전쟁의 격랑기 속에서 부역과 반부역, 광주항쟁에서 90년대 초에 이르는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라는 어두운 역사를 헤치고 살아온 우리이기에 과거의 족쇄에서 많은 사람이 자유롭지 못한 상처와 좌절을 겪었다. 이런 점에서 먼 과거, 가까운 과거를 모두 정리하고 극복하는 전환점이 필요한 것이다.

특히 이철우 의원 같은 386주사파 운동권들은 차제에 스스로 커밍 아웃하는 전향서를 쓰기를 기대한다. 중부지역당 사건은 명백한 사법부 판단과 기록이 나와 있다. 그러나 이미 사면.복권된 마당에 이 의원을 잡고 늘어지는 것은 무의미한 색깔논쟁에 지나지 않는다. 무의미한 논쟁을 유의미한 전환점으로 승화시키기 위해선 이 의원 자신이 진솔한 전향서를 쓰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사상적 굴복을 강요하자는 게 결코 아니다. 자신의 사상 변화를 정리함으로써 80~90년대의 사상체계를 정리하고, 다시는 사상의 미궁에 빠져드는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자발적 전향서를 쓰자는 것이다.

80~90년대의 어둡고 엄혹한 터널을 살아온 386세대들,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고백하는 심정으로 전향서를 쓸 때 그 시대는 어둠의 터널에서 벗어나 밝은 역사의 장으로 살아날 수 있다. 성고문을 당했던 권인숙은 온몸을 던져 독재정권의 성고문 실상을 끝내 파헤쳤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문부식은 긴 감옥생활을 끝낸 뒤 "나는 방화범이었다. 살인의 의도는 없었더라도 사람이 있는 곳에 불을 질러 한 학생의 생명을 잃게 하고 세 명을 다치게 한 방화치사범이다"고 스스로 자책하는 전향서를 썼다.

*** 부끄러움 감추기 아닌가 자성을

DJ정부 이래 민주화운동에 기여했던 사람들에게 물질적 보상을 겸한 정당성 부여를 해오고 있다. 어두운 시대 긴 터널에 갇혀 지냈던 그들에게 몇 푼의 보상이 무슨 의미를 가질까. 또 학생운동의 전력과 '빵잽이'라는 어두운 과거가 이제 훈장이 되어 정치인 패스포트로 이용되는 오늘의 세태는 과연 정상적인가. 386세대로 구성된 과거 전대협 소속 학생회장들이 모여 만든 '전대협, 불패의 신화'라는 책이 있다. 문부식이 지적했듯이 이는 한국 학생운동이 겪었던 보람과 좌절, 열정과 상처, 긍지와 절망의 경험을 자신들의 화려한 경력을 위해 그저 부끄러운 것을 감추는 비열함의 한 단면이 아닌지 자성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국가라는 이름으로 가해졌던 박해를 국가 또는 국회라는 이름으로 명예를 회복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자발적 전향을 통해 어두운 시대를 역사의 장으로 바꿔놓는 노력을 해야 한다.

"진실을 보호한다는 이름 아래 모든 진실을 무의미한 통속성 속에 몰아넣는 도덕적 설교에 의해 기억의 빛이 꺼져 갈 때, 다시 어둠은 닥쳐올 것이다."(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문학과지성사)

권영빈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