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보이가 쏘아올린 월드컵 스타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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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1면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잉글랜드와 콜롬비아의 예선 경기가 열렸던 렌스 펠릭스 볼라에르 스타디움.

'월드컵 공식 볼보이'로 선정돼 운동장에 들어선 열다섯살짜리 검은 머리 소년은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 보는 축구 전용구장의 위용도 위용이거니와 고막이 터질 듯한 함성과 북소리·나팔 소리가 자꾸 발목을 잡아채는 것 같았다. "내가 제대로 걷고 있는 걸까"를 되뇌며 중앙선 부근 터치라인 바깥에 자리를 잡을 때쯤 잉글랜드 국가(國歌)를 따라부르는 축구스타 데이비드 베컴의 비장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나도 언젠가는 저 무대의 주인공이 되겠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지금 그 소년은 프로축구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해 있다. 프로선수가 된 월드컵 볼보이, 바로 김석우(19)다.

#1. 인생을 바꿔버린 한 경기

프로선수가 된 지금도 당시 운동장을 누비던 베컴의 눈빛은 잊혀지지 않는다. 그가 눈 앞에서 베컴의 활약을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98년 초 국제축구연맹(FIFA)의 공식 스폰서였던 코카콜라가 모집한 98프랑스 월드컵 볼보이에 뽑혔기 때문이다. 그는 전국에서 두명 뽑는 중학생 볼보이의 행운을 안았다.

"바로 코 앞에서 베컴이나 마이클 오언 같은 스타들이 화려한 개인기로 수비를 제치고 슛을 작열할 때마다 넋이 빠지더라구요. 그 순간 아무 생각 없이 저의 꿈은 프로축구선수로 바뀌던데요."

#2. 진짜 '선수'가 되기까지

'월드컵 볼보이'가 축구와 처음 대면한 건 초등학교 6학년 때. 단짝 친구가 "동네에 '차범근 축구교실'이 생겼는데 가입하자"며 그의 팔을 끌었다. 친구들에게서 "공 좀 찬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축구는 그저 놀이였을 뿐이었다.

그렇게 재미삼아 공을 찼다면 지금쯤 그는 평범한 대학생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프랑스 월드컵이란 거대한 산이 마음 속에 자리하면서부터 차범근 축구교실의 '뺀질이' 김석우는 어느새 '모범생' 축구선수로 변해갔다.

그런 노력이 마침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건 99년 17세이하 청소년 대표팀 멤버로 뽑히면서 부터. 1m82㎝의 듬직한 키에 스피드가 붙기 시작하면서 대형선수로서의 신체적 조건이 완성돼갔고 프랑스 월드컵에서 느낀 기(氣)가 있었기에 투지도 다른 선수들을 압도했다.

이듬해 일본에서 열린 국제 청소년 축구대회에 주전 수비수로 참가해 확실하게 기량을 인정받았고 이후 줄곧 청소년 대표팀의 중앙 수비수와 오른쪽 윙백으로 출전했다. 주변에서 "차기 대표팀 수비수는 김석우가 제 격이지"란 말이 나돌았다.

#3. 또 한번의 만남

하지만 모든 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시쳇말로 잘나가던 그가 지난해 발목 부상으로 선수 생활에 중대 위기를 맞았다. 17세이하 팀에서 함께 뛰던 동료선수들이 대부분 19세 대표팀에 선발됐지만 그는 부상 때문에 탈락했다.

그런 그에게 다시 한번 운명적인 만남이 찾아왔다. 재활훈련을 하고 있던 지난해 여름. 그는 피트니스클럽에서 평소 우상으로 여기던 홍명보 선수와 마주쳤다. 그는 꾸벅 절을 하고 "명보형 저도 축구해요"하며 다가갔다. 뜻밖에 홍선수는 친형처럼 그를 자상하게 대해줬다. 부상으로 쉬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너무 초조하게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편하게 가져라"고 격려해 줬다.

다음날 다시 운동하러 갔을 때 그를 위해 홍선수가 맡기고 간 국가대표 유니폼 한 벌을 받았다. 20번이 새겨진 홍명보의 대표팀 유니폼을 받아들자 그는 눈물이 왈칵 솟았다. 그리고 프랑스 월드컵을 통해 다졌던 꿈을 되새겼다.

그는 6개월 후 부상을 이겨내고 마침내 올해 초 포항 스틸러스 입성에 성공했다.

아직 여학생과 미팅하고 친구들과 엠티를 떠나는 대학생 친구들이 부러운 열아홉살. 그래서 가족과 멀리 떨어진 포항에서의 합숙 생활이 낯설고 힘들다. 하지만 그는 기다림이 있기에 참을만하다며 마음을 다잡는다.

84년 유럽선수권대회에서 프랑스의 영웅 미셸 플라티니의 플레이에 넋을 잃었던 열두살 볼보이가 98년 프랑스 월드컵 우승의 주역 지네딘 지단이다.'98 월드컵 볼보이' 김석우는 다음 월드컵에서 자신의 꿈을 화려하게 펼칠 날을 힘차게 기다리고 있다.

글=전진배, 사진=오종택 기자

1998년 프랑스 월드컵 공식 볼보이. 운동장에 들어선 열네살 소년은 거대한 구장과 함성소리에 압도당했다. 하지만 그 순간, 데이비드 베컴 선수의 비장한 눈빛만은 또렷이 기억한다. "언젠가 나도 이런 무대의 주인공이 될거야."

2002년 포항팀 입성.지난해 부상으로 위기를 맞았지만 그때의 꿈을 되새기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제부터는 가족과 떨어져 사는 합숙생활,외롭고 낯설다. 하지만 그에겐 다음 월드컵에서 자신의 꿈을 화려하게 펼칠 젊은 날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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