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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뱅크와 지피지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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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메가뱅크라는 이름의 은행권 통합 논의는 올 봄 국제 금융시장이 어느 정도 안정되는 모습을 보이자 일단 수면하로 잠복하는 듯했다. 그러던 메가뱅크론이 요즘 갑자기 불거져 나오는 양상이다.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 내정자의 발언이 직접적인 계기다.

메가뱅크, 논의는 좋다. 하지만 메가뱅크만 만들면 우리나라의 은행산업이 발전하는 것은 물론 세계 일류은행으로 성장할 것이라는 식의 성급한 기대는 곤란하다. 오히려 메가뱅크는 매우 위험한 전략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의 은행들은 국제 금융시장에서 크게 두각을 내지 못했다. 이에 대해선 여러 가지 원인들이 지적된 바 있다. 은행업 종사자들의 전문지식과 어학능력이 부족하고, 선진국들에 비해 은행의 자산규모가 미약하다는 게 주요 원인으로 지적된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다고 본다. 국제 금융시장은 근본적으로 불공정하며, 독과점적인 시장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지난 20년 동안 그 많던 은행이 3개의 메가뱅크로 통합된 일본, 시가총액 면에서 세계 1위를 포함해 상위 10위권을 석권하는 대형은행들을 자랑하는 중국을 들여다 보자. 이들 대형은행의 자산규모가 비약적으로 커진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제 금융시장에서 그들의 위상은 이전과 별로 달라진 것을 느낄 수 없을 정도다.

서방 선진국들은 중국의 제조업 경쟁력과 일본의 첨단기술을 경계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이에 비하면 금융은 영 다르다. 중국과 일본의 금융회사들이 아무리 대형화하더라도 선진국들은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상대로는 보지 않는다. 이게 엄연한 현실이다.

상상이긴 하지만, 가령 일본의 3대 메가뱅크들이 통합해 자산규모 면에서 초대형 수퍼뱅크를 만들기로 합의한다고 치자. 강력한 경쟁자의 출현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뉴욕이나 런던의 증시에서 금융회사들의 주가가 출렁이는 사태가 발생할까?

시가총액 기준으로 세계 1위인 중국의 은행들은 물론이고,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인 일본의 메가뱅크들도 신용등급은 유럽의 조그만 은행에도 뒤진다. 이런 현실은 국제 금융시장의 구조적 모순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게다가 국제 금융시장에서 자국의 통화가 기축통화로 통용되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의 은행 간에는 경쟁력에서 현저한 차이가 발생한다. 미국의 은행들은 자국 통화로 해외영업을 하고 있지만, 우리의 은행들은 외국의 통화로 해외영업을 할 수밖에 없다. 원화를 주무기로 삼는 우리나라 은행들이 달러를 주무기로 하는 미국 은행들과 경쟁하는 과정은 불공정 경쟁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처럼 국제 금융시장은 구조적으로 불공정하다. 경쟁여건이 원천적으로 갖춰져 있지 않은 대표적인 시장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을 딛고 한국이 일본이나 중국의 사례를 뛰어넘어 은행 산업에서 차별화된 업적을 일궈내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은행들이 몸집을 다소 늘렸다고 해도 불공정 구조와 모순이 시정돼 공정경쟁 여건이 조성되기 전까지는 국제금융 무대에서 섣부른 기대는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삼성전자가 성공한 배경엔 국제 금융시장과는 달리 공정경쟁이 가능한 무역시장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택수 국제금융센터 이사장

◆한택수(60) 이사장은 서울대와 보스턴대 대학원을 나왔다. 행정고시 11회. 재정경제원 관세국장·국고국장을 역임한 재무관료 출신. 손꼽히는 일본통으로 일본 인맥이 두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