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한 불펜 승리의 보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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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선발투수는 정규시즌을 맡고, 불펜(구원투수)은 플레이오프를 맡는다. 그리고 홈런타자들이 펑펑 쏘아올리는 홈런은 텔레비전 하이라이트에서나 긴요하게 쓰인다."

지난주 미국 댈러스 모닝뉴스지의 에반 그랜트 기자의 글에서 최근 프로야구 흐름을 적절히 지적한 글귀를 발견했다.

요즘 프로야구에서 선발투수는 승부를 결정짓기보다는 경기의 흐름을 유지해 주며 구원투수와 마무리투수가 단기전일수록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화려한 홈런타자는 정작 승부에는 큰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국내 프로야구에서 홈런왕이 속한 팀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것은 1995년 김상호(당시 OB) 이후 한번도 없다. 메이저리그에서도 80년 내셔널리그 홈런 1위 마이크 슈미트가 속한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월드시리즈 정상에 오른 뒤 20년 넘게 홈런왕이 속한 팀은 월드시리즈 우승과 거리가 멀다.

선발투수의 역할은 어떤가. 90년대 중반까지는 선발투수만 보면 대충 그날의 승부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비중이 컸다. 그러나 요즘엔 선발투수만 보고 '아, 오늘은 이 팀이 이기겠구나'란 생각을 하기 어렵다. 투수 분업화가 정착되고 구원투수의 비중이 높아진 탓이다.

지금보다 총 28경기가 적은 5백4경기를 치렀던 86년 '투수전의 백미' 1-0 경기는 17차례가 기록됐다. 그러나 지난해는 5백32경기 가운데 딱 두 경기에서 1-0 스코어가 나왔다. 완투가 줄어들고 불펜의 의존도가 높아졌음을 제대로 보여주는 기록이다.

지난해 두산은 10승 투수가 한명도 없으면서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라 구원투수들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입증했다. 이혜천·차명주·진필중으로 대표되는 두산의 불펜은 8개 구단 가운데 가장 안정됐고 한국시리즈에서도 삼성의 불펜에 비해 월등한 우위를 보였다.

메이저리그에도 불펜의 중요성을 입증해 주는 기록이 있다. 아서 로즈(왼손)·제프 넬슨(오른손)으로 짜인 셋업맨과 사사키 가즈히로를 최종 마무리로 보유한 시애틀 매리너스는 지난해 1백16승이라는 역대 정규시즌 최다승 기록을 세웠다.

매리너스가 이처럼 '역대 최강'의 승률을 올린 데는 불펜의 견고함이 큰 몫을 했다. 매리너스는 7회까지 리드를 잡은 경기에서 95.2%를 이겼다. 30개팀 가운데 가장 높은 비율이다. 그만큼 불펜이 강했다.

반대로 우리와 친숙한 LA 다저스는 7회까지 앞선 경기에서 83.3%밖에 이기지 못했다. 구원투수진이 그만큼 불안했던 탓이다. 다저스의 불펜은 지난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이어 두번째로 허약했다.

구원투수들은 이처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마운드에 올라있는 시간이 짧아 큰 인상을 주지는 못한다.

또 최종 마무리투수는 승리의 환호와 함께 세이브라는 기록을 챙겨가지만 중간계투에게는 기록으로 남는 것도 별로 없다. 2년 전 '홀드'란 기록이 생겼지만 아직 그 중요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구원투수는 이처럼 '무명용사' 취급을 당한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승부가 판가름나는 순간 마운드를 지키는 소중한 병사들이다.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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