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직 비디오가 한국 가요 망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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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얼마 전 데뷔 앨범을 낸 신인 가수 A씨. 제작사가 음반에 담을 노래 즉 음원(音源)을 만드는 데 쓴 비용은 약 6천만원이었다. 아무리 늘려 잡아도 1억원을 넘지 않는다.

반면 뮤직 비디오 제작비로는 2억원 가까이 들어갔다. 여기에 지상파 TV와 케이블 채널 등에서 뮤직 비디오를 틀기 위해 필요한 공식·비공식 비용까지 포함하면 비용은 두배로 뛴다는 게 제작사측의 말이다.

5억원 이상의 투자비를 회수하려면 앨범을 얼마나 팔아야 할까. 15만장을 팔아야 겨우 손익분기점에 도달한다. 그러나 최근 인기와 음반 판매량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극심해진 한국 음반시장에서 신인이 15만장 이상의 앨범을 팔기란 극히 어려운 일로, 거의 도박에 가깝다.

뮤직 비디오가 한국 가요계를 멍들게 하고 있다. 2~3년 전부터 본격화한 가수들의 뮤직 비디오 경쟁이 심화하고 그에 따른 폐해가 극에 달하면서 "뮤직 비디오가 한국 가요를 망친다"는 여론이 대중음악계에 확산되고 있다. 특히 음반 제작자들 사이에서는 "지금 같은 소모적인 뮤직 비디오 경쟁이 결국 음반업계를 공멸의 길로 몰고 갈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기형적인 뮤직비디오 제작 풍토=지난 연말 새 음반을 내놓은 한 인기 댄스 그룹이 모 유명 뮤직 비디오 감독측에 지불한 돈은 2억2천만원. 그러나 실제로 뮤직 비디오를 만드는 데 들어간 돈은 8천만원 정도에 불과하다는 게 업계 관계자의 말이다.

뮤직 비디오 한편을 찍는 데 필요한 시간은 보통 3~4일, 길어야 일주일이다. 후반 작업까지 포함해도 2주일이면 끝난다. 결국 그 뮤직 비디오 감독은 한달도 안 걸린 작업의 대가로 1억4천만원을 챙긴 셈이다. 최근 가장 인기있는 한 한국 영화 감독이 1년 가까이 영화를 만들고 받은 개런티도 이 정도는 안된다. 기형적인 고액인 것이다. 한 중견 가요 기획사 관계자는 "구체적인 사용 내역은 전혀 모른다. 유명 뮤직 비디오 감독들의 경우 요구하는 금액을 그냥 줄 뿐"이라고 말했다.

배우·탤런트들의 뮤직비디오 출연료도 급상승하고 있다. 최근 한 남자 배우가 뮤직 비디오에 출연하고 받은 돈은 4천만원. 며칠 촬영하고 받은 출연료가 지난해 석달 넘게 찍었던 한 영화 출연료와 비슷한 것이다.

이에 대해 대부분 CF감독을 겸하는 유명 뮤직 비디오 감독들은 미국 등은 뮤직 비디오 제작비가 한국보다 훨씬 더 많다고 반박하지만, 비교도 안되는 음반 시장의 규모를 감안하면 이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뮤직 비디오가 음악 상업화 부추긴다=뮤직 비디오 때문에 음반 제작 비용이 급증하면서 갖가지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우선 음악의 상업화다.

제작자들은 막대한 투자비를 회수하기 위해 어떻게든 많이 팔릴 음악만을 만들려 하고, 결국 외국 노래 번안곡,리메이크곡, 예술성과는 무관한 단순 샘플링곡들이 양산되고 있다. 뮤직 비디오 마케팅 덕분에 가창력과 음악성에서 수준 미달인 신인 가수들이 쏟아져, 음악성 있는 가수와 그렇지 않은 가수간의 옥석 구분이 안되는 것도 문제다.

뮤직 비디오 방영과 관련한 잡음도 끊이지 않고 있다. 한 신인 가수의 음반 제작자는 "시청자들에게 뮤직 비디오를 많이 노출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하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갈수록 질이 떨어지는 뮤직 비디오=뮤직 비디오가 양산되면서 질은 오히려 떨어지고 있다. 길어야 5분 이내의 짧은 시간 안에 시청자의 눈길을 붙잡아야 되는 뮤직 비디오의 특성과 어떻게든 화제를 낳고 싶어하는 제작자의 욕구가 결합되면서 비현실적이고 자극적인 스토리와 화면을 담은 뮤직 비디오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한 가요 홍보 전문가는 "최근 군대의 실상과 거리가 먼 스토리를 담은 한 뮤직 비디오에 대해 국방부가 방송국에 방송 금지를 요청하는 등 강력히 항의했지만 이런 일이 논란이 되고 기사화하면 오히려 해당 뮤직 비디오와 노래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 홍보 효과를 낳는다"고 말했다.

◇"좋은 음악 만드는 데 돈 써야"=대다수 대중음악 관계자들은 뮤직 비디오 마케팅이 음반 시장을 공멸의 길로 몰아 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MBC FM 조정선 PD는 "뮤직 비디오는 음악적 상상력을 제약해 장기적으로 음반 시장의 위축을 가져온다. 음반 제작자들은 네가 만드니까 나도 만든다는 식의 '죽음의 수건 돌리기'를 자제해야 한다. 대부분의 제작자가 망하고 있지 않은가. 막대한 뮤직 비디오 제작비를 양질의 음악을 만드는 데 써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최재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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