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털도사'님 채연이 예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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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8면

황사를 떨쳐낸 파란 하늘이 고마운 3월의 어느 날. 진달래의 분홍 꽃망울이 제법 흐드러진 남산골 한옥마을. 따뜻한 봄볕 아래 정담을 나누기에 딱 좋은 때와 장소였다. '임꺽정''머털도사' 등 시대물 만화가로 잘 알려진 이두호(59)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와 MBC-TV의 사극 '상도'에서 기구한 운명의 채연 역으로 인기가도를 달리는 김유미(22)씨. 진한 고동색 개량한복 차림의 이교수는 일찌감치 도착해 있었다. 약속 시간이 20분쯤 지났을까. 나풀거리는 노란 블라우스와 베이지색 치마, 엷은 브라운색 하이힐로 한껏 봄단장을 한 김유미씨가 깡충거리며 뛰어왔다.

"선생님, 저 '머털도사'팬이에요."

"김유미씨, '상도'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이런. 의례적인 인사려니 했는데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서로의 작품에 대해 느낀 점을 토하듯이 주고 받았다. 기자가 끼여들 틈은 애당초 없었다.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의 만남은 그 자체가 행복인 것일까. 하긴 처음부터 이렇게 잘 풀리는 대담도 흔한 일은 아니렷다.

이=비련의 여인 채연을 잘 소화하던데요.

김='경찰특공대'에서의 이미지가 너무 강해 고민하던 차에 채연역 제의를 받았어요. 동정받는 캐릭터가 맘에 들었지요. 하지만 너무 처량한 모습만 보인 것 같아 아쉬워요. 슬프면서도 해맑은, 기품 있으면서도 밝은 모습을 보였으면 좋았을텐데.

이=사극이 처음인가요.

김=예. 처음엔 한복이 어울릴까, 말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걱정했는데 좋은 선배님들과 함께 하다 보니 잘 적응하게 된 것 같아요. 선생님도 사극을 좋아하시나요.

이=원래 역사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사극에도 관심이 많지요. 최근 사극 붐이랄 정도로 프로그램이 많은데 역사와 동떨어지게 드라마적 재미만 추구하는 경우가 있어 곤혹스러울 때가 있어요.

김=어떻게 시대물을 주로 그리게 됐나요?

이=만화는 중학교 때부터 그리기 시작했는데 원래 꿈은 화가였어요.(이교수는 홍익대 미대를 나왔다) 어느 날 문득 주위를 살펴보니 다른 사람들이 다 나를 만화가라고 불러요. 1980년대 초였나. 그때 참 고민 많이 했어요. 그러다 결심했지. 최고의 만화가가 되겠다고. 그러기 위해서는 나만의 독특한 무엇이 필요했어요. 굳이 '우리 것을 찾아야겠다'라는 거창한 마음은 없었지만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를 파고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김=선생님 작품 중에 채연과 비슷한 캐릭터가 있나요.

이=임꺽정을 흠모하는 여인중 향심이란 기생이 있어요. 원래 자현이라는 이름의 양반집 규수인데 가마를 타고가다 물에 빠진 뒤 꺽정이에게 구출되지요. 하지만 집안 어른들은 '백정의 손을 탔다'며 죽이려 하고 결국 기생이 되지요. 양반집 규수에서 노비로 전락했다가 사당패가 된 뒤 임상옥을 흠모하는 채연 캐릭터와 참 비슷하지요.

김=선생님은 '상도'를 어떻게 보셨어요.

이=최인호씨의 원작도 그렇고, 드라마 초기에도 그렇고 이 드라마는 말 그대로 '상도', 즉 경제 정의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최근엔 '송상'과 '만상'간의 갈등을 부각하는 데 치중한 나머지 원래의 의도가 제대로 표현되지 않는 것 같아 아쉽지요. 채연이도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쥔 비중있는 캐릭터로 만들 수 있을 텐데.

자리를 전통찻집으로 옮겼다. 이교수가 미리 준비한 '임꺽정'그림책을 내밀었다. 김씨는 페이지를 넘기며 연신 "너무 멋있다"고 말했다. 그때 이교수가 김씨의 손가락을 보았다. 오른손 약지가 붕대로 둘둘 감겨 있었다. 영화 '폰'에서 둔기로 상대방을 내리치는 장면을 촬영하다가 실수로 찧었는데 뼈에 금이 갔단다.

이=어떤 영화인가요.

김=미스터리 심리극이에요. 국내에서는 공포물이라면 피가 튀거나 깜짝 놀라게 하는 영화를 생각하는데 '식스센스'같이 반전이 있는 작품이에요. 개인적으로도 반전이 있는 작품을 좋아해요. 선생님도 새로 책을 내신다고 하던데.

이=3월말에는 10권짜리 '객주'가 복간되고 4월 중순에는 21권짜리 '임꺽정'이 30권으로 보충돼 나와요. 새 작품이 아닌 복간이라는 게 작가로서 찜찜하네요. 새 작품도 빨리 선보여야 할텐데.

김=저도 5월에 새 드라마(로망스)를 시작해요. 이번엔 발랄한 대학생역이에요.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새로운 인생을 경험한다는 것은 탤런트의 가장 큰 장점 같아요.

이=사람을 많이 만나다 보면 스트레스도 많을텐데 잘 이겨내길 바래요. 난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빨리 잊을려고 노력해요. 잊는 것도 훈련이에요. 마음이 편해져야 좋은 작품이 나와요.

이교수는 김씨에게 "큰 연기자가 될 것을", 김씨는 이교수에게 "재미있는 좋은 작품을 계속 보여줄 것을"당부했다. 그들은 한옥마을의 기와집을 나와 각자 갈 곳으로 돌아갔다. 솟을대문이 그들을 따뜻하게 배웅했다.

글=정형모, 사진=장문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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