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 퇴치가 확실한 안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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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오늘날 인류는 과거 어떤 시대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이같은 풍요를 인류 전체가 고루 누리는 것은 아니다. 한쪽은 쓰고 싶은 대로 맘껏 쓰고도 남을 정도로 여유가 있는 반면 다른 한쪽은 쓰려고 해도 쓸 것이 없는 절대적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이 같은 불평등은 다음과 같은 현실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세계 인구의 5분의1인 12억명은 하루 1달러도 안되는 돈으로 살아간다. 상위 5분의1이 세계 전체 소득의 80%를 차지하는 데 반해 하위 5분의1은 1%밖에 벌지 못한다.1960~2000년 양자(兩者) 간 소득 격차는 두 배(倍)로 늘었다. 어린이들 가운데 1억3천만명은 교육을 받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30억명이 각종 질병에 노출된 비(非)위생적 생활환경에서 살고 있으며, 해마다 2백만명이 에이즈로 생명을 잃는다.

2000년 9월 열린 유엔 밀레니엄 정상회의는 8개 '개발 목표'를 세웠다. 그중 가장 중요한 내용이 2015년까지 하루 생활비 1달러 이하 인구를 절반으로 줄이는 것이다.92년 리우 지구정상회의에서 정한 '의제(議題)21'대로 선진국들이 매년 국내총생산(GDP)의 0.7%를 후진국에 대한 경제원조에 돌리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현재 약속을 지키는 나라는 네덜란드·룩셈부르크·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 다섯 나라뿐이다.유럽연합(EU)은 평균 0.33%, 미국은 0.1%에 불과하다.

세계은행은 2015년까지 예정된 목표를 달성하자면 현재의 원조 액수보다 매년 4백억~6백억달러가 더 필요하다고 추정한다. 영국의 해외원조 민간단체 옥스팜은 이보다 훨씬 많게 잡아 1천억달러가 추가로 소요될 것이라고 예측한다.'부자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 회원국 모두가 '0.7% 약속'을 지킨다면 해마다 1천1백40억달러가 늘어남으로써 목표 달성을 위한 충분한 재원 확보가 가능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18~22일 멕시코 몬테레이에서 열린 유엔 개발재원 국제회의는 선진국들에 약속 이행을 촉구하기 위해 코피 아난 사무총장이 내놓은 아이디어에 따른 것이다. 59개국 정상들이 참석한 이번 회의는 선진국의 후진국에 대한 경제원조 증액과 외채 탕감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몬테레이 합의서'를 채택했다. 그러나 아난 사무총장이 당초 목표로 삼았던 매년 5백억달러의 원조 증액 합의 도출은 실패로 끝났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2004년부터 3년간 매년 현재보다 50억달러 늘린 1백50억달러를 원조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후진국들에 시장개방과 부패추방, 그리고 법치확립 등 태도 변화를 '조건'으로 제시했다. 영국의 한 민간단체 관계자는 부시가 제시한 조건들이 명분은 훌륭할지 몰라도 단기간에 이루기 힘든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미국 상품의 후진국 시장 진출을 위한 미끼로 원조를 사용하려는 발상이라고 비판한다.

얼마 전 부시 행정부는 2003년 회계연도 예산에서 군사비를 4백80억달러 늘려 3천9백61억달러로 책정했다. 앞으로 계속 늘어 5년간 2조1천억달러를 지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천문학적 숫자의 군사비 가운데 일부를 대외원조로 돌린다면 미국의 안보는 훨씬 더 튼튼해지지 않을까. 부시 자신도 인정한 것처럼 테러리즘의 온상인 빈곤과 절망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안보다.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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