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없다 잔악한 본성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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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올 초 코미디 영화 '휴먼 네이처'가

개봉된 적이 있다. 야생에서 성장한 동물

같은 사람을 실험실에 가두고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욕망인 성욕을 주목했다.

영화는 20세기에 융성한

동물 행동학의 분석 틀로 성의 본체를

파헤치며 인간과 동물은 다르지

않다는 점을 보여줬다. 실험을 뜻하는

제목처럼 공포영화 '엑스페리먼트'도

동물 행동학적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본다.

사이보그·인공두뇌 등 '털없는 원숭이' 의 기계적 측면을 드러내는 데 열중하고 있는 현대 과학의 '비인간성' 논의가 진부하게 느껴지는 이 시대에, 사람과 동물의 상사성(相似性)을 다룬다는 게 특별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엑스페리먼트'는 매우 충격적인 작품이다. 우리에게 내재된 근원적 폭력성을 소름 끼치도록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71년 스탠퍼드大서 실험

더욱 충격적인 것은 소재 자체가 실제 얘기라는 데 있다. 1971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서 진행됐던 '스탠퍼드 감옥 실험'이 영화의 모체다. 대학측은 신문 광고를 통해 가상 감옥에 '투옥'될 참가자를 공모하고, 이들을 통해 인간의 의지, 즉 극한상황 속에서도 타인에 대한 배려가 가능한가 하는 것을 탐구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만인 대 만인의 투쟁' 비슷하게 2주로 예정됐던 실험은 단지 닷새만에 끝났다. 그것도 엄청난 인명 피해와 함께…. 자기 구역을 침범하면 생사를 걸고 달려드는 많은 동물처럼 사람 또한 자신의 영역이 침해받을 경우 극단적인 폭력을 일삼는 존재로 추락했던 것이다.

'엑스페리먼트'는 인간의 잔인성에 대한 영화적 보고서다.

각기 4천마르크(약 2백40만원)를 받는 조건으로 첨단 하이테크 감옥에 들어간 죄수 열두명과 간수 여덟명의 혈전을 통해 인간이 서로에게 얼마나 가공스러운 동물로 돌변할 수 있는지를 압축했다.

모의 실험의 첫째 조건은 절대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것. 그러나 이같은 비폭력 원칙은 단 이틀만에 깨지고 만다. 죄수의 신체를 구속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간수의 우월 의식과 이에 반항하는 죄수의 갈등이 격화하면서 사태는 도저히 되돌릴 수 없는 핏빛 잔혹극으로 내달린다.

극악한 폭력 모골이 송연

영화는 실험실의 비인간성을 폭로해 언론사로부터 거액을 타내려고 들어온 죄수 타렉(모리츠 블라입트로이)과 자존심이 강한 항공사 직원 출신의 간수 베루스(유스투스 폰 도나닐)의 대립을 축으로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죽여야 하는' 인간사의 모순, 상대에 대한 공포로부터 빚어지는 극악한 폭력을 소위 모골이 송연해지게 표출한다.

'엑스페리먼트'는 '불쾌한' 영화다. 휴머니즘·이성·평화 등 세상사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폭력과 투쟁이 삶의 감춰진 진실이라면…. 생각할수록 두렵다. 올리버 히르쉬비겔 감독. 15세 이상 관람가. 22일 개봉.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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