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린 임금·실업 해결하라" 中 노동자들 곳곳 시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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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플래카드와 피켓을 든 수백명의 노동자들이 핏발 선 눈으로 시청 안마당에 들어섰다. 공안(公安·경찰) 1천여명을 태운 트럭들이 황급히 뒤를 따랐다. 청사 정문에 나타난 관리들의 얼굴은 바짝 굳어 있었다."

20일 낮 중국 랴오닝(遼寧)성 랴오양(遼陽)시에서 벌어진 노사분규 현장이다.

이 도시의 철강노동자 3만여명은 밀린 임금 지급과 구속동료 석방을 요구하며 나흘째 시위를 벌인 끝에 이날 관리들과 면담을 시작했다.

랴오양뿐 아니다. 헤이룽장(黑龍江)성 다칭(大慶)유전도 시위바람에 휩싸였다. 6·4 천안문(天安門)사태 당시 민주화운동 지도자였던 한둥팡(韓東方)은 지난 13일 "다칭유전 해직근로자 5만여명이 복직과 퇴직수당 정상지급 등을 요구하며 2주일째 시위를 벌이고 있다"고 전했다.

인민해방군 탱크여단과 민병대까지 동원돼 시위대를 삼엄하게 감시한 때문에 특별한 충돌은 없었다. 그러나 언제라도 유혈시위로 치달을 가능성은 남아 있다.

중국 당국의 엄격한 보도통제를 감안하면 더 많은 노동자 시위가 중국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을 것으로 홍콩 내 인권단체들은 보고 있다. 밀린 임금·수당을 요구하는 '생존권'차원 시위에서 특정관리 퇴진 요구 등 '정치시위'로 번질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중국 당국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세계무역기구(WTO)가입 이후 중국시장이 국제경쟁에 노출되면서 비슷한 시위가 급격히 늘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시위는 체제의 근간을 흔들 수도 있는 사안이다.

시위의 근본 원인은 두가지다.첫째, 산유량과 철강수요 감소로 유전·철강 노동자의 절반 이상이 실업 또는 반(半)실업 상태인데도 정부가 무대응으로 일관한 점을 들 수 있다.

실업 근로자를 위한 사회보장기금 마련도 지방정부의 재원출연 거부로 지지부진한 상태다.

지방관리의 부패와 무능도 노동자들의 분노를 부추겼다. 관료들은 여러 경로를 통한 근로자들의 건의를 대부분 묵살했다.

중국 국무원이 직접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주룽지(朱鎔基)총리는 최근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실업수당·연금을 철저하게 지급하라는 특별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샹화이청(項懷誠)재정부장은 8백60억위안(元·14조2천억원)의 실업기금을 긴급 편성했다.

또 실업자문제를 전담할 특별대책반을 총리 직속으로 설치할 계획이다.

베이징=유광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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