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을 환자와 함께 한 의료계'큰별' : 故 문창모 박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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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의사가 된 지 66년, 나이가 아흔이 된 지금도 나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저녁 8~9시까지 일한다. 나는 별무(別無)취미로 도무지 재미가 없는 사람이지만 이런 진료생활을 축복으로 여긴다."

13일 오전 96세를 일기로 타계한 문창모(文昌模)박사가 1996년 출간한 자서전 『천리마에 꼬리를 붙인 쉬파리』의 한 대목이다. 이날 빈소가 차려진 원주기독병원 영안실을 찾은 박형진(朴亨鎭·68)원주문화원장은 "고인은 의료계는 물론 종교·정치·교육 등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존경하는 분"이라며 "강원도 원주의 큰 별이 졌다"며 애도했다.

文박사는 70년간 환자들의 곁을 떠난 적이 거의 없다. 의사로서는 외도(外道)랄 수 있는 전국구 의원(14대) 시절에도 원주에서 새벽에 진료를 한 뒤에야 서둘러 여의도 의사당으로 떠났다. 의정활동을 마치자마자 원주로 되돌아와 환자를 봐야 직성이 풀렸다. 그는 92년 고 정주영(鄭周永)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권유로 국민당 전국구 1번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고인은 2000년 6월 의약분업과 관련한 의료계 파업사태 때도 "환자들을 나 몰라라 할 수 없다"며 진료실을 지켰다.

96년엔 딸을 만나러 미국에 갔다가 점심만 함께 한 뒤 곧장 돌아온 적도 있다. 며느리 정복희(68)씨는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는 환자들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다며 토요일에 미국으로 떠났다가 사흘 만에 돌아오셨다"고 회상했다. 그래서 그는 원주 일대에서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렸다.

평북 선천 출신으로 31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文박사는 47년 국립 마산결핵요양소장이 됐다. 이후 세브란스병원장·대한결핵협회 사무총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대한결핵협회에서 일할 때 크리스마스 실을 최초로 발행했다.

고인은 58년 원주연합기독병원(연세대 원주기독병원의 전신)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원주 시민들과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었다. 그는 64년 원장직을 떠난 뒤 원주시 학성동에 문이비인후과를 열었다. 이곳에서 지난해 3월 26일 건강상의 이유로 헤드미러를 벗고 면봉을 놓기까지 43년간 진료했다. 그는 한센병 환자 집단촌이 원주에 들어설 수 있도록 앞장섰고, 이들이 자립에 성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아픈 이들을 위한 그의 배려는 각별했다. 농촌지역의 학생과 직장인들을 배려해 매일 오전 6시30분에 어김없이 진료를 시작했다. 고인이 장로로 있었던 원주 제일감리교회 김명기(金明冀·60)담임목사는 "그분은 어려운 이웃을 위한 봉사를 신앙생활보다 더 마음에 새기고 평생을 보내셨다"고 회고했다.

국민훈장 모란장과 대한민국 건국포장, 대한결핵협회 대상, 세계평화복지인물대상, 적십자사 광무장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자서전 외에 『내 잔이 넘치나이다』가 있다. 유족은 1남 1녀. 발인은 18일 오전 7시. 장지는 대전국립묘지. 033-741-1994.

원주=이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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