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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사이버 바다의 은빛 고기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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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집권당 내부에서도 ‘참패(慘敗)’와 ‘선방(善防)’ 간 논쟁이 한창이다. ‘지자체 선거는 여당의 무덤’이라는 전통적 공식에 비춰 ‘선방’을 앞세우는 청와대 자위파와, 2년 뒤 총선에서 재발할지 모를 참사에 등이 바짝 단 한나라당 쇄신파 간의 설전은 급기야 당(黨)·청(靑) 투쟁의 화염으로 번졌다. 충청·강원·경남을 다 내주고 서울과 경기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으니 그것은 분명 집권당의 패배고, 2년 뒤 총선과 대선이 ‘위험지대’로 진입했다는 경고음이다.

경고음을 발한 주역은 젊은 세대였다. 40대에서 20대로 내려갈수록 ‘한나라당 혐오증’이 강하게 표출됐는데, 그것은 ‘민주당 선호’가 아니라 대여섯 명 늘어선 선택지에서 ‘한나라당 빼고’ 다른 곳을 꾹꾹 눌러 찍은 ‘응징의 결재’였다. 이 응징투표는 노무현 정권 때 치러진 2006년 총선과 2007년 대선에서도 똑같이 위력을 발휘했고, 이제 그것이 당시의 수혜자에게 옮겨 붙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불행한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젊은 층의 미묘한 기류 변화를 간파한 민주당은 표정 관리에 들어갔고, ‘뭐가 잘못인데?’라고 반문하는 한나라당은 당황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민주주의의 묘미는 패자에게 재기할 기회를 주고, 정당이 민심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패배 후 청와대의 첫 행보는 구태의연한 민생 시찰이었다. 그것은 ‘응징의 젊은 표심’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불감(不感)의 화답이었다. 이 불감의 행보를 소통의 명목으로 줄곧 연출해 왔음을 1970년대식 감각으로 알아차리기는 어렵다. 라디오 담화, 인터넷 대화, 청년지원정책, 국제인력 양성 등 진취적 프로그램을 왕성하게 추진해 온 청와대와 집권당으로선 소통 결핍이란 비난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젊은 층의 억하심정(抑何心情) 아니면 좌파 단체의 선동 탓으로 돌리는 경향도 있는 것으로 미뤄 청와대와 한나라당의 불감증은 소통 부족보다는 ‘교감신경의 마비’라고 하는 편이 옳겠다. 발칙한 반란과 이탈의 주역인 젊은 층, 사이버 바다에 뛰노는 은빛 고기떼 같은 젊은이들이 민생 시찰의 현장에 있을 리 없다.

투표 얼마 전, 유력 일간지들은 촛불시위 2주년을 맞아 당시의 광증(狂症)이 얼마나 웃기는 짓이었는지를 낱낱이 환기시켰는데 젊은 층의 반응은 ‘그래서?’였고, 언론의 저의가 냉소적 놀이의 대상이 됐다. ‘진실의 재구성’에 재미를 느끼는 그들의 감각은 북한제 어뢰 파편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그것이 북한제임을 들이대는 ‘권력의 방식’을 수많은 가상 시나리오로 해체해 또 다른 진실을 구성해 내는 젊은 층의 감성 프리즘에 의해 공식 언술은 조롱거리로 변했다. 사이버 바다를 유영하는 은빛 고기떼에게 공증된 진실은 의미가 없다. 4대 강, 세종시의 손익계산서를 유심히 살펴 달라고 애걸할수록 생태·인권·평화의 대칭적 가치 영역으로 빠르게 몰려간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 오래 머물지도 않는다. 대안적 가치가 어떤 압력으로 다가올 때 그들은 미련 없이 이동한다. 2007년 선거에서 이들이 민주당에 등을 돌렸던 이유다. 그러니 개발연대의 관습을 버리지 못한 한나라당과 각종 국책사업에 눈코 뜰 새 없는 청와대가 무슨 수로 이들과 교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소장파의 요구대로 참모 교체와 인적 쇄신을 단행해도 그런 교감신경이 생겨날지는 의문이다. 돌아선 젊은 층에 말을 거는 사람이 한나라당에는 아무도 없다. 지도부는 관행대로 물러났고, 뭔가 촌철살인의 화두를 고대하는 기자들에게 박근혜 전 대표는 맥없는 멘트를 날렸다. ‘별로 드릴 말씀이 없어요’. 대통령은 드릴 말씀이 많겠지만 젊은 층의 감성대를 건드리지 못한다. 멀리 가 버린 은빛 고기떼들을 다시 불러들일 매혹의 언어, 회유의 언술을 발견하지 못하는 한 2년 뒤 대선은 힘겨운 싸움이 될 것이다. 서울시장 선거가 그것을 충분히 입증했다. 정권 교체 시계가 재깍재깍 돌아가고 있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