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도와주십시오, 국민여러분 9회 막 오른 은행합병(下) : 실업 심각해지자 구조조정 의지 한풀 꺾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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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즉석 안건이 있습니다."

1998년 11월 27일 여의도 금융감독원에서 오전 7시부터 열린 금감위 전체회의.

점심 시간 무렵 이헌재 금감위원장이 윤원배(현 숙명여대 교수)부위원장에게 의사봉을 넘기고 회의장을 뜨자 금감위 남상덕 제2심의관(현 청와대 비서관)이 기다렸다는 듯 새 안건을 올렸다.

'조흥은행에 대한 경영개선조치 요구의 건'.

금감위가 금융기관에 내릴 수 있는 3단계 징계 중 둘째로 강한 '경영개선요구'를 발동한다는 것으로 위성복 행장을 포함한 경영진 문책이 알맹이였다. 魏행장이 10월 말까지 합병을 하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한 데 대한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었다.

자료를 보자마자 위성복의 광주고 1년 후배인 이용근 금감위 상임위원(현 한국 아서 앤더슨 고문)의 안색이 변했다.

"부위원장, 사전 협의도 없이 이런 안건을 올릴 수 있는 거요."

이용근의 반발에 윤원배가 주춤하자 남상덕은 이헌재에게 전화를 해 어찌하면 좋을지 물었다.

"무슨 소리야. 당장 원안대로 통과시켜."

이헌재의 호통이 떨어졌다.

난감해진 윤원배는 마침 점심 도시락이 배달돼 오자 정회를 선언한 뒤 급하게 전화로 위성복을 찾았다.

"魏행장이 사표를 안내시면 강제 문책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훗날을 생각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사표를 내면 모르되 문책을 당하면 그때부터 최소한 3년 동안은 다시 은행 임원이 될 수 없으니 스스로 물러나는 형식을 취하는 게 낫다는 설득이었다.

위성복은 승복했다.

도시락 점심 후 회의가 재개될 때 '魏행장과 두 명의 상무가 자진 사퇴했다'는 조흥은행의 보도자료가 이미 팩스로 들어와 있었다.

곧 이어 금감위는 조흥은행에 대한 경영개선요구 안건은 원안대로 통과시키되 경영진 문책 안건은 심의하지 않기로 하고 서둘러 회의를 마친다.

당시 위성복이 금융계 '실세'로 통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김옥두 국민회의 의원(지역구가 위성복의 고향인 전남 장흥), 박주선 청와대 민정수석(광주고 후배) 등 내로라 하는 여권 실세들과의 친분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위성복이라도 10월 말까지 합병을 못하면 물러나겠다는 각서를 이미 써냈던 터라 금감위가 원칙대로 문책을 하더라도 할 말이 없는 처지였다.

그런데도 금감위가 정회까지 해가며 위성복에게 스스로 물러날 기회를 준 이유는 뭘까.

시간을 되돌려 위성복이 조흥은행장에 취임한 8월 20일.

장철훈 전임 행장이 부실 경영 책임을 지고 한달 전 물러나는 바람에 위성복은 6개월 사이 상무에서 행장까지 두 계단을 승진한다. 그러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합병 시한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는데 마땅한 '신부감'을 찾지 못한 탓이었다. 신한·보람·주택은행과 잇따라 '선'을 봤지만 모두 퇴짜를 맞았다.

초조하게 맞은 9월 초.

초저녁에 귀가하던 위성복은 차 안에서 이헌재의 전화를 받는다.

위성복의 회고.

"이헌재 위원장이 느닷없이 '장기신용은행은 혼자 살 수 없으니 장은과 합병하라. 그러면 공적자금도 지원해 주겠다. 장은 쪽에도 얘기해 놓았다'고 했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음날 장은 오세종 행장도 이헌재 위원장의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당시는 금감위에 경영개선계획을 낸 7개 은행 중 네 곳의 진로가 확정돼 있었다. 상업·한일은 합병,외환은 독일 코메르츠방크의 출자로 독자 생존, 평화는 자체 증자 후 독자 생존이었다.

남은 곳은 조흥·강원·충북 세 곳이었다. 이헌재는 이 세 곳이 합병해 봐야 회생 가능성이 작다고 보고 장은을 끌어들였던 것이다. 장은은 겉으론 우량은행에 끼여 있었지만 속으론 기업대출 부실로 골병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정작 장은은 딴 궁리를 하고 있었다.

오세종의 증언.

"우리는 이미 한두 달 전부터 국민과 합병 협상 중이었다. 조흥과 합병하라는 이헌재 위원장의 권유는 이를 잘 모르고 한 얘기였다. 당시 조흥은 부실 은행으로 알려져 합병하면 장은 주가도 떨어질 판이었다. 게다가 기업대출이 주특기인 우리로선 가계대출에 주력해온 국민과 합병하는 게 유리했다."

9월 10일 장은이 조흥을 외면하고 국민과 합병을 선언하자 이헌재의 구상도 헝클어졌다.

남은 길은 두 가지-.

세 은행을 퇴출시키든가, 아니면 합병하게 한 뒤 공적자금을 넣어 살려 주는 것이었다.

5개 은행을 퇴출시킨 6월 말의 잣대로 보면 강원·충북은 퇴출을 피하기 어려웠다. 98년 하반기에 이미 부채가 자산보다 많았고 증자를 해낼 가능성도 희박했다. 조흥도 독자 생존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조흥·강원·충북에 합병을 구실로 공적자금을 넣어 살려주면 5개 은행 퇴출과 형평이 맞지 않는다는 비판을 면키 어려웠다.

그러나 경제 상황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었다.

7월이 되자 실업자가 1백50만명을 넘어섰다. 퇴출 공포에 떨던 은행들이 돈을 풀지 않으니 기업 부도가 급증하며 실업자가 양산됐다. 현대자동차·은행 노조의 파업과 시위가 잇따랐다.

그러자 DJ가 나섰다.

8월 24일 취임 6개월을 맞은 DJ는 기자간담회에서 "9월 말까지 1차 기업·금융 구조조정을 마무리짓고 꽉 막힌 돈줄부터 풀겠다"고 밝힌다.

DJ의 발언은 9월 2일 경제대책조정회의에서 9월 말까지 공적자금 21조원을 풀어 은행과 보험사의 부실채권을 우선적으로 사준다는 결정으로 구체화한다. 금융기관들이 퇴출 공포에서 벗어나 돈줄을 풀게 하자는 취지였다.

이는 그동안 구조조정부터 해야 공적자금을 지원해 준다는 '선(先) 구조조정 후(後) 공적자금 지원' 원칙을 정부 스스로 허무는 것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9월 28일 23개 은행과 2개 보증보험사엔 21조원의 공적자금이 한꺼번에 투입됐다.무차별적인 공적자금 투입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다음날 DJ는 취임 후 첫 경제특별회견을 통해 "1차 구조조정이 끝났다"고 선언한다.

이로써 조흥은 물론이고 강원·충북의 퇴출도 사실상 물건너 간다.

이를 간파한 위성복은 재빨리 각각 강원·충북의 대주주인 현대그룹과 한국도자기 쪽에 조흥과의 합병 의사를 타진한 뒤 10월 19일 이헌재를 찾아 간다.

다시 위성복의 회고.

"이헌재 위원장과 단둘이 만나 삼자 합병안을 꺼내자 처음엔 '안된다'고 딱 잘랐다. 그래서 이제 와 세 은행을 퇴출시킬 거냐며 30여분을 설득했더니 '자료를 놓고 가라'고 했다."

이틀 후 이헌재는 위성복을 다시 불렀다.

"삼자 합병안이 위에 다 보고됐는데 명분이 약해요. 이번 기회에 조흥이 본점을 지방으로 옮기면 어떻습니까."

사실 대형 시중은행 본점의 지방 이전은 7월에 DJ가 내각에 지시한 사항이었다. 그러나 이를 받아들일 은행이 나서지 않아 사실상 포기하고 있다가 조흥이 강원·충북과 합병한다고 하자 다시 '지방 이전'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하루 빨리 우량은행으로 거듭 나려면 본점을 지방으로 옮기는 게 득보다 실이 많았다. 그러나 위성복은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심정에 흔쾌히 이헌재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10월 말이었던 합병 시한도 자연스럽게 연장됐다.

그러나 삼자 합병 시나리오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암초를 만난다.

비밀리에 진행되던 삼자 합병이 11월 1일 언론에 새나간 것이 발단이 됐다.

다음날 강원·충북의 노조가 발칵 뒤집혔다. 급기야 두 은행 행장은 "조흥이 합병 제의를 했으나 모두 거절했다"며 합병설을 부인해 버린다.

충북은 11월 19,20일 증자가 무산된 뒤에도 증자 일정을 일방적으로 연기하며 막무가내로 버텼다.

재경부도 꼬투리를 잡았다. 강원은 자산을 초과하는 부채 부분만큼 대주주인 현대가 메우고 나서 합병하라는 것이 재경부의 요구였다. 그러나 현대는 "그렇게는 못하겠다"며 버텼다.

다급해진 위성복은 현대라도 붙잡아야 했다.

이어지는 위성복의 증언.

"정몽헌 회장을 만나도 안돼 혹시나 하고 이익치 현대증권 사장을 찾아갔다. 그는 뜻밖에 '왕회장께서 시중은행 대주주가 되는 데 관심이 있으니 걱정말라'고 장담했다. 설마 했는데 일주일쯤 뒤 현대측에서 '합병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현대를 설득할 수 있는 기미가 보이자 위성복은 11월 24일 다시 이헌재를 찾아갔다.

20일만 더 시간을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잠시 위성복의 설명을 듣던 이헌재는 몹시 고민스런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강원·충북에서 호남 출신 행장을 봐주려고 지방은행 다 죽인다는 말이 자꾸 나와 입장이 난처합니다."

위성복더러 물러나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위성복이 조흥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금감위의 복안을 요구하고 고참 상무 두 명을 구제해 달라며 버티자 이헌재는 11월 27일 금감위 전체회의에 경영진 문책 안건을 올렸던 것이다.

위성복이 이렇게 물러난 뒤 삼자 합병은 빠르게 진행됐다.

12월 17일 강원이 먼저 조흥과 합병을 선언했다. 그러나 두 은행은 합병 비율을 둘러싼 논란 때문에 99년 9월에 가서야 합친다.

해를 넘기며 버틴 충북은 이듬해 1월 말 다시 한번 증자를 시도했다가 실패하자 2월 12일 조흥과의 합병안에 도장을 찍는다.

삼자 합병의 틀이 완성되자 합병은행장 선임이 이슈가 됐고 자연스럽게 위성복의 복귀 여부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금감위는 외부인사가 행장이 되기를 내심 바랐다.

김원길 국민회의 정책위의장(현 민주당 의원)의 회고.

"魏행장을 복귀시키는 것을 두고 말이 많았다. 그러나 魏행장이 물러나면서 시중은행 중 호남 출신 행장이 한 명도 없다는 불만이 당내에서 쏟아져 당 중진 몇몇이 이를 정부에 얘기했다. 또 세 은행 합병 후 혼란 상황을 魏행장만큼 수습해낼 행장감을 찾기도 어려웠다."

조흥은행 행장추천위는 4월 9일 위성복을 단독 후보로 추천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그는 사표를 낸 지 4개월여 만에 합병조흥은행장으로 '권토중래(捲土重來)'한다.

1차 은행 구조조정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다음편 '금융구조조정의 복병-한남투신'은 20일자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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