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이란 말에 씌워진 거품 빼고 싶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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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는 신학을 공부하려고 철학과로 진학했다. 그런데 곁에서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을 보면 은근히 샘이 났다고 한다. 결국 1년 만에 대학을 중퇴하고 군대를 다녀온 뒤 뒤늦게 홍익대 미대에 입학했다. 

“지금은 다른 직업을 가진 친구가 전혀 부럽지 않아요. 그림을 택한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어요.” 최근 디자인 이야기를 담은 만화책 『디자인 캐리커처』(디자인하우스)를 낸 만화가 겸 일러스트레이터 김재훈(43·사진)씨 얘기다.

그는 만화를 그리면서도 문화를 소재로 한 문화카툰(‘나비’), 책에 대한 북카툰(‘김재훈의 책갈피’), 신화를 소재로 한 만화(‘주신전기’)를 주로 그려왔다. 그의 책을 사봤다는 한 네티즌은 자신의 블로그에 “그의 글과 그림에서 인문학에 대한 깊은 내공이 느껴진다”고 적었다.

‘디자인’은 그가 새롭게 도전한 소재였다. 애플의 디자인담당 부사장인 조너선 아이브(‘스티브 잡스의 커튼’)에서부터 사탕 추파춥스의 포장지 그림을 그린 살바도르 달리는 물론 청바지·전투기·포스터 등 20세기를 대표하는 디자인과 디자이너에 얽힌 50개의 에피소드를 유머 있게 그려냈다. 왜 디자인이었을까.

“디자인이라는 말에 씌워진 거품을 빼고 싶었어요. 디자인이라고 하면, 비싸거나 고급스러운 것 아니면 겉치레나 포장을 먼저 떠올리잖아요. 그런데 디자인이 생겨나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우리 삶과 정말 밀착해 있거든요. 그런 내막을 알기 쉬운 말로 전하고 싶었어요.”

그가 택한 ‘알기 쉬운 말’, 그게 만화라는 설명이다. “요즘 『순수이성비판』을 다시 읽어보니 칸트의 유머가 정말 놀랍더군요. 관념론과 경험론 진영의 팽팽한 논쟁도 흥미진진하고 칸트가 한 말을 보면 소심하면서도 고집스러운 성격까지도 보여요. 항상 책을 보면 이렇게 재미있는 얘기를 만화로 그리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디자인에 대한 만화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캐리커처는 상황과 등장인물의 성품까지 포착해 이야기의 핵심을 그림으로 보여주죠. 순차적으로 읽히는 글과 달리 전체 이야기를 관통해 한 장면으로 연출하니 더 쉽고 재미있는 게 매력입니다.”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시야를 넓힌 그는 지난 1년간 디자인 만화를 중앙일보의 일요신문인 ‘중앙SUNDAY’에 연재하며 더 많이 공부했다고 한다. 디자인 관련 책을 수십 권 섭렵했고, 디자이너들도 많이 만났다. “자료조사를 아무리 많이 해도 잘난 척, 아는 척하는 것은 금물이에요. 공부한 티를 내는 순간 바로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나오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그의 캐리커처 작업은 끊임없이 덜어내는 일이기도 하단다.

마흔이 넘었지만 그에겐 꿈이 있다. 정보만화 분야를 개척하는 일이다. 네모난 칸에 그림을 그려 넣는 만화의 틀을 벗어나 좀더 새롭고 열린 형식으로 정보를 만화에 갈아 태우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현재 세계사를 소재로 한 만화를 준비 중이고, 다음엔 근대철학을 캐리커처처럼 그릴 계획이다.

글= 이은주 기자, 사진= 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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