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소비가 살아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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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한 해가 저물어가는 요즘 세상의 관심은 내년도 우리 경제가 어떻게 될지 그 전망에 모아진다. 기관에 따라 편차가 크긴 하지만 공통점만 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올해보다 경기가 더 나쁠 거라는 것이다. 성장률은 높게 보아야 4% 중반이고 비관적인 쪽은 2%대까지 내려 잡는다. 성장률이 5.3% 정도는 돼야 경제가 정상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경제학자들 대상의 설문조사 결과에 비춰보면 매우 우울한 전망이다. 경기를 나쁘게 전망하는 이유로는 올해 좋았던 수출이 상대적으로 어려울 것인 데 반해 소비와 투자는 회복이 더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다만 하반기에 소비가 회복될 것이라고 보는 기관은 상대적으로 낙관적 전망을 하는 데 비해 소비회복이 더딜 것으로 보는 기관은 그렇지 못하다. 결국 경제를 끌고가는 가장 중요한 성장 엔진인 소비가 얼마나 되살아나 주느냐가 관건이다.

그런데 소비 회복에 대한 낙관적 전망은 지난해 이맘때도 있었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은 2004년에는 민간소비 증가율이 4% 중반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민간소비는 올해 전망과는 정반대로 오히려 더 감소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공교롭게도 현 정부가 들어선 직후부터 지금까지 소비가 계속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경기순환론으로는 설명이 안 되며 다른 이유가 있다.

나는 현재의 소비침체는 경제 내적 원인과 함께 집권층의 시장억압적 국정운영이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이 구조조정으로 투자 여력이 없었을 때 우리 경제를 받쳐준 것은 다름아닌 가계들의 탄탄한 소비력이었다. 그러나 가계의 소비력도 한계가 있는 법. 열악한 기업환경 등으로 기업투자가 계속 부진하고 가계소비가 비축한 체력을 소진함에 따라 성장률이 저하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현 집권층은 들어서면서부터 경제 주체들을 겁주는 정책과 발언을 계속했다. 숲속의 동물들은 주변이 불안하면 먹는 것을 멈추고 움직이지 않는다. 현 경제 상태가 이와 흡사하다. 모두들 소비를 자제하고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정부가 아무리 대량으로 자금을 동원해 투자를 유도한다 해도 일시적인 경기부양에 그칠 공산이 크다. 집권층이 진정으로 경제 회복을 바란다면 겸허한 자기반성의 토대 위에 경기부양책이 아닌 성장 잠재력 회복정책을 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우선 기업과 가계 등 경제 주체를 존경하기 바란다. 국민을 귀하게 여기라는 말이다. 정권이 국민의 경제적 자유와 재산권을 존중하면 국민도 정권을 신뢰하고 존경하게 된다. 언필칭 공익을 내세우지만 실은 혼내주고 싶은 기업들만 골라서 제재하는 법이나 정책을 만드는 정권은 공익의 가면 아래 사익을 추구하는 것이다. 또 9.23(성매매금지법) 사태와 같이 새 잡는 데 대포 쏘는 식으로 경제를 흔들어 놓으면 힘든 사람들만 더 힘들어지게 된다. 국민을 존경한다면 좀더 조심스럽게 정책을 추진하게 될 것이고 국민이 불안감을 거두게 된다. 그러면 투자와 소비도 살아날 것이다.

다음으로 기업환경을 개선해 성장 잠재력을 회복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정부가 거머쥐고 있는 각종 규제의 기득권을 포기하는 데서 시작된다. 현재처럼 노동시장.금융시장.토지시장 등 생산요소 시장이 규제로 묶여 있는 한 투자가 회복되기 어렵다. 특히 노동시장에서는 파견 등 비정규직에 대한 규제가 완화돼야 하며 외국인 근로자의 도입을 확대해 중소기업의 인력난을 덜어주어야 한다. 요컨대 다른 나라와 최소한 비슷한 기업환경이라도 만들어 주어야 한다.

국정 운영 기조가 경제적 자유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기업환경 개선을 위해 정부 스스로 기득권을 포기하는 진지함을 보인다면 기업투자와 가계소비는 보다 쉽게 살아날 것이다. 위협이 사라진 숲에 평화가 찾아오듯이….

남성일 서강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