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주류문화 입성 팬터지 만화 : 한·일 팬터지 만화 계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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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흔히 팬터지 장르의 첫머리로 1954년 출판된 JRR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을 꼽는다. 켈트·북유럽 신화와 기사문학 등에 기반을 둔 톨킨의 소설은 팬터지의 모델이 됐다. 마법사·기사·요정이 등장하는 만화는 일단 톨킨의 소설에 기초한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동아시아에는 전통적인 팬터지 장르가 존재했다. 각각 개성적인 능력을 보유한 의인화된 동물들이 삼장법사와 천축으로 여행을 떠나며 요괴를 퇴치하는 오승은의 '서유기'가 대표적이다.

이 두 개의 뿌리에서 팬터지 만화는 싹을 틔웠다. '반지의 제왕'에서 피어난 가지는 '로도스도전기''아스루란전기'와 같은 일본판 팬터지 소설과 만화를 낳았으며, 여기에 영향을 받아 김태형의 '레드블러드'와 양경일의 '소마신화전기'가 탄생했다.

신일숙의 '리니지'와 권교정의 '헬무트'역시 '반지…'의 뿌리에서 뻗어나간 가지에 열린 열매다.

가끔 열매가 뿌리를 부정하기도 하는데, 독특한 개그 만화인 야가미 류의 '엘프 사냥꾼'이나 간자카 하지메 원작의 '슬레이어즈'가 그런 작품들이다.

데즈카 오사무의 '도로로'는 일본과 동양의 설화 속 요괴가 등장하는 작품으로 '서유기'의 영향을 받았다(데즈카 오사무는 '서유기'를 만화로 옮기기도 했다). 요괴가 등장하고, 요괴를 퇴치하며, 운명을 걸고 그들과 싸우는 이른바 퇴마물의 패턴은 '서유기'와 '도로로'를 거쳐 완성됐다.

이후 나가이 고의 '데빌맨'은 악마와 인간의 싸움, 악마들이 사는 공간, 세기말적 분위기를 보여주었고, 이런 경향은 하기와라 가즈시의 '바스타드'와 도다시 요시히로의 '유유백서'로 이어졌다.

한편, 미우라 켄타로우의 '베르세르크'는 중세를 배경으로 한 퇴마 액션 팬터지다. 본격적인 퇴마의 경향은 오기노 마코토의 '공작왕'에서 시작돼 다카타 유조의 '3×3 eyes'로 이어졌고 그 줄기는 양경일·윤인완의 '아일랜드''좀비헌터''신암행어사'를 낳았다. 이마 이치코의 '백귀야행'은 '도로로'의 뿌리에서 태어난 낯선 열매. 이강우의 '리버스'는 '반지…'의 줄기와 '서유기'의 줄기에 붙어있는 하이브리드형 팬터지다.

'서유기'는 여러 버전으로 변형됐는데, 도리야마 아키라의 '드래곤볼'이 대표적이다. '드래곤볼'의 팬시형 팬터지는 허영만의 '날아라 슈퍼보드'와 이충호의 '까꿍'으로 이어졌다. 고진호의 '서유기 플러스 어게인'은 '리버스'처럼 양쪽 경향에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이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팬터지 만화들은 '서유기'와 '반지의 제왕'이라는 동서양의 대표적인 팬터지 소설에 뿌리를 두고 발전하며 하나의 거대한 나무를 이룬 것이다.

박인하(만화평론가·청강문화산업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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