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로를 '분수 터널'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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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5면

푸른 하늘이 드높기만한 2004년 10월 3일 오전 11시. 세계박물관협의회(ICOM) 연차 총회가 열리는 날이다. 행사장인 세종문화회관 앞 광장에서는 식전 행사 준비가 한창이다.

여기에서는 총회에 맞춰 한국을 찾은 세계 미술관·박물관 관계자들과 대통령·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물의 아치' 개통식이 열린다. 이윽고 대통령이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식장에 도착했다. 서울시장과 세계박물관협의회장 등이 곁에 도열했다. 잠시 후 대통령과 서울시장·시민대표가 버튼을 누르면 앞으로 서울의 랜드마크가 될 물의 아치가 열린다. 개량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대통령이 서울시장과 함께 버튼 앞에 섰다. 드디어 하얀 장갑을 낀 이들의 손끝이 버튼에 닿았다. 그러자 삽시간에 세종로 양쪽에 설치된 6백개의 분수에서 시원한 물줄기가 솟구쳐 올랐다.

해맑은 가을 햇살이 물줄기에 반사되자 일순 일곱 색깔 무지개가 하늘에 피어올랐다. 2년여의 공사 끝에 드디어 21세기 서울,아니 한국의 최고 명물인 물의 터널이 길을 연 것이다.

"와!" 일제히 탄성을 지르는 관객들. 여기저기에서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신명나는 울림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어떤 이들은 터널 속으로 달려가 어린애 마냥 아예 웃통을 벗어던진 채 물 세례를 받으며 자지러지게 환성을 질러댔다.

대목을 만난 듯 교보문고 뒤 피맛골 '맛의 거리' 주인들도 갖은 전이며 부침개·찌개 등을 내놓고 손님 맞느라 입을 다물 새가 없다. 독일인인 세계박물관협의회장은 연신 "분더바!(최고)"를 외치며 "'물의 아치' 개통으로 한국의 서울은 이제 세계인들의 가슴 속에 깊이 자리잡게 됐다"고 말했다. 2000년 뉴밀레니엄을 기념한 영국 런던의 거대한 유람 수레바퀴인 '런던 아이',그리고 파리의 에펠탑·개선문 등에 손색이 없는 모뉴먼트라는 칭찬도 했다.

이날 물줄기를 연 6백개의 분수대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는 세종로를 사이에 두고 교보문고~문화관광부,세종문화회관~정부중앙청사를 잇는 양쪽에 설치됐다. 조잡했던 가로등은 바닥 조명을 대체하고 그 옆에 분수대를 세웠다.

분사기의 문양은 서울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해 세웠다는 광화문 앞 해태상에서 따왔다. 해태의 입에서 뿜어 나오는 물로 서울의 화기를 다스린다는 뜻에서다. 6백개는 정도(定都) 6백년이 넘은 서울의 역사를 상징한다. 양쪽 6백m의 거리에 2m 간격으로 각각 3백개씩을 세웠다. 3백개가 너비 1백m에 이르는 세종로를 서로 엇갈리게 뿜어내는 식으로 설계됐다. 밤이면 형형색색의 바닥 조명이 분수를 비춰 만화경을 연출할 수도 있으며,물줄기의 형태도 직선·곡선 등 다양한 형태로 꾸며질 수 있다.하절기 6개월간 하루 3~4차례 물을 뿜게 된다.

당초 '물의 아치' 아이디어는 지하철 공사로 인해 생긴 지하수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관리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던 중에 나왔다. "그래, 그 지하수를 '물의 아치'에 활용하자." 5호선 광화문 역사 밑에서 솟아나는 하루 5백t의 맑디 맑은 지하수를 분수로 활용하면 자원낭비도 줄이고 시민에게는 청량제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비단 광화문역뿐만 아니라 서울시내 곳곳에는 지하철 공사 중 인공적으로 수맥을 끊어 발생하는 지하수가 그냥 버려지고 있는 실정이다. 물의 터널은 그걸 효과적으로 활용한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이제 서울시민들은 일상의 피로를 씻어줄 명물 하나를 갖게 됐다. 물의 아치는 단순한 랜드마크의 의미를 떠나 맥동하는 서울, 서울사람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자고로 물은 재생력과 생명력, 창조·생산의 근원이 아니었던가. 고답적인 관청 밀집지역인 세종로는 이제 시민의 휴식처로 거듭났다. 햇살 따사로운 어느날 분수대 옆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환담을 나누는 시민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맥이 제대로 돌아야 세상이 건강하다. 청신한 상상력이야말로 맥을 돌게하는 원동력이다. 세상을 멋지게 뒤바꿔볼 '아름다운 상상'들을 모아 연재한다. 당장 실현 가능한 것도, 먼 훗날 꼭 이뤄졌으면 좋을 꿈도 좋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력 릴레이를 통해 틀에 갇혀 갑갑한 나와 세상의 변화를 모색해 본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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