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장선 '야드' 정육점선 '근' 아파트는 '坪' '미터법'이 안먹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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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약재 도매상들이 몰려 있는 서울 경동시장. 3일 대부분의 약재상은 근(斤)단위로 한약을 팔고 있었다. 법정 단위인 킬로그램(㎏)용 저울은 아예 보이지 않는다.

한약상 김정애(70·여)씨는 "㎏은 몸무게를 재는 것 아니냐"면서 "한약은 원래 근으로 단다"고 말했다.

1964년 만들어진 국가표준기본법, 이른바 '미터(m)법'이 사문(死文)화됐다.

이 법대로라면 포목점에서 쓰는 '마', 정육점이나 한약방의 '근', 일부 골프장의 '야드', 건축 관련 '평', 옷에 쓰이는 '인치' 등은 모두 불법이다.

뿐만 아니라 '비법정 계량 단위를 거래 또는 광고에 사용할 경우 1백만원 이하 과태료를 부과한다'는 규정(계량에 관한 법 제3조)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처벌받은 사례는 거의 없다.

산업자원부는 지난해 3월 전국의 18홀 이상 골프장 1백34곳 중 야드를 사용하는 63곳에 "6월 말까지 미터로 안 바꾸면 과태료를 부과하겠다"고 통보했다. 하지만 업자들의 반발로 처벌 계획을 백지화하고 말았다.

산자부는 지난 1월엔 전국의 건설·부동산 업체에 "아파트 분양 때 평방미터(㎡)가 아닌 평(坪)을 사용하는 건 불법"이라며 "올해까지만 두 단위의 병기(倂記)를 허용한다"고 공문을 보냈다.

여기에도 부동산 중개업자나 분양업자들의 반발이 뒤따랐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 J부동산 김중현(47)씨는 "지난해 업무가 전산화돼 등기부등본에 ㎡가 사용되지만 실제 거래에선 일일이 평으로 환산하느라 번거로움만 늘었다"고 불평했다.

규정을 믿다가 오히려 피해를 본 사례도 있다.

60년대 중반부터 미터자를 생산해 온 남선계기업사 백옥기(85)사장은 요즘 진정서를 들고 산자부 등을 찾아다닌다. "정부 지침대로 미터자만 생산해 왔는데 요즘 인치·마 등 불법 단위자에 밀려 생계를 위협받고 있다"고 항변했다.

서울 신설동 노라노양장학원의 이주삼 원장은 "옷 재단때 센티미터(㎝)를 쓰는 일은 거의 없다"며 "오히려 대학에서 센티미터로 배운 의상학과 졸업생들이 학원에서 인치로 재교육을 받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2000년 7월 계량에 관한 법을 개정할 당시 산자부는 과태료 조항이 실효성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없애지 못했다.

산자부 관계자는 "처벌없는 규정은 법리상 모순이 돼 존속된 것으로 안다"며 "대신 지난해 7월 골프장 소동 이후 처벌은 하지 말라는 내부 규약을 별도로 마련했다"고 말해 사실상 있으나마나 한 조항임을 시인했다.

이에 대해 성균관대 황대준(전기전자)교수는 "국제화 흐름에 맞춰 정부가 국제 표준 단위 사용을 위한 대대적인 캠페인에 나서든지, 아니면 아예 처벌 규정 등을 없애 일상 생활의 혼돈을 막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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