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는 민간이 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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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관료가 장사하면 안된다. 장사는 민간인이 해야 한다."대통령 연두 기자회견 이래 실망을 안겨주었던 DJ가 공기업 노조의 파업을 앞두고 시의적절하고 정곡을 찌르는 발언을 했다.

정부의 공기업 민영화 원칙을 재삼 강조하면서 실행부문의 방법론까지 언급했다. 영국의 사례를 들어 민영화가 오히려 경영을 악화시킨다는 철도노조의 주장에 대해 대통령은 우리의 민영화 구상과 영국은 다르다고 설명했다. 영국은 시설과 경영분야를 모두 민영화했지만 우리는 시설은 국영으로 두고 운영만 민영화한다는 것이다. 그는 구체적 사례까지 들었다."철로는 사회간접자본(SOC)으로 이를 만드는 것은 정부가 해야 하지만 서비스 경영은 민간이 해야 하는 것"이며 때문에 장사는 민간인이 하는 게 좋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DJ 특유의 3단논법식 공기업 민영화 논리다.

일본의 지방을 여행해본 사람이라면 기차여행의 쾌적함을 누구나 알 것이다. 눈덮인 북부의 산골 간이역까지 기차는 어김없는 시간에 들어오고 정확한 시간에 출발한다. 자동차 여행보다는 비싼 편이지만 그 편리함과 쾌적함은 어떤 수단의 여행보다도 윗길이다. 그 철도가 모두 국철(國鐵) 아닌 사철(私鐵)이다.

철도·가스·발전 모두 국가의 기간산업이면서 동시에 국민에겐 생활필수품에 속하는 소비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기간산업의 시설은 국가가 맡고 운영과 서비스는 민간이 맡는 게 너무나 당연한 것이고 때문에 공기업의 민영화는 세계적 추세다. 해서 우리도 이미 오래 전부터 민영화 추진을 연구해왔고 철도는 올해 민영화를 추진하고, 발전회사는 이미 지지난해 민영화법이 국회를 통과해 실시시기만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두고 새삼 노조가 파업 투쟁을 벌였고 정치권은 여야 가릴 것 없이 철도 민영화에 대해 시기상조니 더 연구해봐야 하느니 하며 노조편을 들고 있다. 긁어 부스럼 내 표를 잃기보다 그냥 넘어가자는 얕은 정치적 계산뿐이다.

현정권 임기가 1년도 남지 않았다. 어느 나라, 어느 정권이든 임기말이란 게 있다. 우리 역대 정권 또한 임기말 레임덕 현상으로 국정이 흐트러지고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채 표류해왔다. 그렇다면 이 정권에서나마 여야가 할일은 해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가 있어야 했다. 비록 노조에 외면당하고 교통혼란으로 시민의 불평이 일시적으로 터져 나온다 해도 할 일은 해야 한다는 손톱만한 애국심의 발동이라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정치권은 여야 가릴 것 없이 눈을 감거나 거꾸로 민영화 반대편에 서 있다. 아무리 대통령이 당 총재직을 내놨다 해도 여당마저 대통령의 정책과 거꾸로 간다면 이 무슨 콩가루 집안인가.

철도 민영화는 이 정권이 해결해야 할 시급한 과제다. 내년 말이면 고속철도가 개통된다. 이미 1조5천억원의 부채를 안고 있는 철도청이 고속철도를 인수할 경우 2004년 13조원, 2020년엔 28조원이라는 기하급수적 부채를 안으리라는 게 정부 예상이다. 반면 민영화를 통해 경영합리화를 할 경우 2019년 부채가 정리된다고 보고 있다. 이 계산이 미덥지 못하다면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고 다시 계산해볼 일이다. 그런대도 마치 핀을 뽑은 폭발 직전의 수류탄을 내손에서 남의 손으로 떠넘기려는 양 내 정권, 내 임기 안에는 할 수 없다는 식으로 서로 미루는 꼴이다.

최근 대법원은 정리해고나 사업조직 통폐합 같은 기업구조조정은 단체교섭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이를 반대하는 노조의 쟁의행위는 불법이라는 명쾌한 판결을 내렸다. 길게 보면 지난 10여년간 노사분규의 가장 뜨거운 쟁점을 대법원 판결로 가이드 라인을 확정한 것이다. 글로벌시대에 글로벌 잣대로 향후 노사분규를 풀어가야 할 전환점이 된다는 점에서 획기적 판결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그런데 아직도 농성을 풀지 않고있는 발전노조의 요구를 보면 대법원 판결이 무색하다. 2년 전 국회에서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발전민영화법을 지금 와서 철회를 외치고 있다.

2년 동안 가만히 있다가 지금 와서 철회를 요구하는 것은 임기말 힘빠진 정권을 흔들어 원상회복을 노린다는 비난을 면키 어렵다. 장사란 노조가 하는 것도, 관료가 하는 것도 아닌 민간인 몫이다. 노사협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민영화 문제를, 그것도 2년 전 노조 스스로 수용했고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에서 통과된 사안을 갑자기 없던 일로 하자며 파업하는 이런 불법 행위에 정부가 눈치보며 협상 테이블에 나가고 국회가 모른 척 하는 이런 얼빠진 행태를 국민은 언제까지 바라보고 있어야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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