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엔 산업 올스톱된 느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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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50면

"한국 소비자들은 새로운 상품에 대한 호기심과 소비 욕구가 많다. 한국인 임직원들은 부지런하지만 창의성과 개성이 부족한 것 같다."

국내에서 회사 경영을 책임지고 있는 주한 외국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이 사업 활동을 펼치면서 체득한 한국인과 한국 임직원에 대한 평가다.

대표적인 국내 진출 외국기업 CEO들이 그동안 한국에서 사업하면서 느낀 한국정부와 기업의 관행, 한국 소비자들의 성향, 그리고 한국인 임직원들의 특성 등 '한국 비즈니스 여건'을 솔직하게 밝혔다.

조언을 해 준 CEO는 한국P&G 앨 라즈와니 사장, 한국후지제록스 노부야 다카스기 회장, 미셸 캉페아뉘 알리안츠제일생명 사장, 존 테일러 브리티시아메리칸토바코(BAT) 사장, 말콤 혼 첩시큐리티 코리아 회장 등이다.

◇투자 여건은 OK, 한국기업 경영 방식은 손질해야=한국 정부가 외국인 투자 촉진법을 제정한 것을 비롯해 ▶외국환 관리법 개정▶세금관련 제도 정비 등 모든 분야에서 선진국 수준으로 제도와 법이 정비됐다.

특히 KOTRA의 원스톱 서비스와 외국인 투자 옴브즈맨 제도 등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한 활동은 일본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한다.

기업의 경우 '경영의 투명화'와 '노사 신뢰 관계 구축'이 기업과 국가 경제를 강하게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노부야 회장)

한국 기업들은 계약상의 조건들이나 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하며, 종종 사업상의 계약보다는 개인적인 친분 관계에 의해 사업이 주도되는 경우가 있다.(말콤 혼 회장)

한국기업들은 의사결정에 걸리는 시간이나 업무 추진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러나 외국기업들이 전문가를 키우는 반면 한국 기업은 어느 업무나 맡겨도 가능한 일반 직원(제너럴리스트)을 키우는 경향이 강한 듯하다. 때로는 '보직 순환 제도'를 통해 조직내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는 방식이 중요한 의사 결정 때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한국기업은 의사 결정이 몇몇 핵심 인물에 의해 이뤄지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앨 라즈와니 사장)

서구기업은 대체적으로 직원들이 자료와 결정 대안을 상사에게 제출하면 상사가 최종 결정을 하는 시스템이다. 반면 한국 기업에서는 직원들이 결정하고 상사는 승인만 한다. 이같은 시스템은 때때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를 불러 올 수 있으며 전략없이 일관되지 않는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미셸 캉페아뉘 사장)

한국 기업에는 직원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지시하는 대로 따라주기를 원하는 권위적인 경영자들이 많은 것 같다. 직원들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은 경영자로서의 가장 큰 임무라고 생각한다. 또 기업들 간에 서로의 지적 자산을 보호하고 존중하면서 협력함으로써 장기적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더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존 테일러 사장)

◇소비자들이 왕성한 구매욕구=한국 소비자들은 변화에 빠르게 적응한다. 높은 인터넷 및 광대역 통신망 보급률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다만 한국인들은 충동 구매를 하며 비싼 값의 브랜드를 선호하는 특성이 있다.(미셸 캉페아뉘 사장)

한국경제 성장의 큰 원동력은 한국 소비자의 왕성한 구매력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소비재의 경우 소비자 연령도 젊고, 고부가가치화·다양화가 진행되어 소비자 성향이 비슷하다.(노부야 회장)

한국 소비자들은 대체로 풍부한 소비 성향이 있다. 새로운 기술들에 대해 관심이 많고 좋아하는 것 같다. 반면 서비스가 빨리 처리되기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말콤 혼 회장)

◇부지런하지만 상사를 너무 의식하는 한국 임직원들=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일에 대한 열정과 애사심을 가지고 있다. 또한 업무 방향이 결정되면 추진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그러나 상사의 의견에 대하여는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경향이 있다.(앨 라즈와니 사장)

한국 직원들은 매우 역동적이며 열심히 일하지만 인맥을 중시하는 특성이 있다.(미셸 캉페아뉘 사장)

책임감과 애사심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하지만 개개인의 높은 교육 수준과 역량에도 불구하고, 자율적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것에 익숙지 않은 것 같다. 일의 과정보다 결과를 중요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여기에 한 몫을 더하는 것 같다.

직원들이 오랜시간 열심히 근무하지만 시간관리가 다소 비효율적이고 따라서 낭비하는 시간도 적지 않다. 일례로 직원들이 점심을 먹으러 나간 낮 12시와 오후 1시 사이에는 온 나라와 산업이 실제 정지된 듯한 느낌이다.

또 각종 경조사나 생일 등 여러 종류의 개인적인 행사 때 회사로부터 지원을 받기를 바라는데, 이런 것들은 서구기업의 기준에서 보면 수용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임원들이 각종 경비를 사용하는데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도 지적하고 싶다.(말콤 혼 회장)

직장에 매달려 가정에 소홀히 할 때도 적지 않은 듯하다. 일에서 성공하고 가정에서 실패한다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존 테일러 사장)

표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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