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1> 제100화 '환란주범'은 누구인가 ⑤ 'IMF행 번복' 큰 파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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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신임 임창열 부총리가 그날(1997년 11월 19일) 'IMF행' 발표 예정 사실을 인계받았느니 못 받았느니 하는 것은 한마디로 난센스다. 이미 밝힌 대로 그가 알고 있었다는 증거는 충분하다.

그래서 이 난센스는 더 이상 나의 관심 사항이 아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진짜 문제는 우리 정부와 IMF 총재 사이의 기본 합의를 새 부총리가 뒤집어버린 것이다.

결국 林부총리는 이틀을 못 버티고 21일 IMF 구제금융 신청을 발표한다. 우리의 발표 스케줄과 불과 이틀 차이였지만 그 대가는 너무나 컸다.

IMF가 금융지원을 확약하면 환율이 내려가고 외환시장이 안정되는 것이 통례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21일 달러당 1천1백원이었던 환율은 계속 뛰어 불과 한 달 뒤에는 1천6백18원으로 47%나 올랐다.

우리가 경질되기 전날인 18일까지만 해도 1백59억 달러나 남아있던 가용외환보유액은 IMF 지원 요청 뒤에 더 가속적으로 줄어 12월 하순에는 거의 바닥이 나는 상황까지 갔다.

그날 새 부총리의 'IMF행 부정' 발표는 한국 경제가 겪고 있던 신뢰의 위기에 결정타를 가하는 것이었다.IMF 지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나라가 IMF와 미국·일본의 신뢰를 잃었다고 판단하자, 외국 투자자들은 경쟁하듯 한국에서 돈을 빼갔다. 더구나 대통령 후보였던 DJ는 선거 전략만 생각하는 '재협상' 발언 등으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내가 11·19 개각과 더불어 'IMF행 번복'이 진정한 의미의 환란에 빠져드는 과정의 시작이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IMF행을 결정하면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고통은 불가피하다고 예상했다.그러나 그를 계기로 유동성 위기 해결의 실마리를 잡는 동시에 바람직한 구조조정을 추진해 결국 경제의 선순환(善循環)을 이룰 것으로 생각했다.

그 뒤 IMF가 우리에게 요구한 구조조정과 긴축정책 중 구조조정은 우리가 당연히 받았어야 하는 것이었고, 원래 강경식 부총리와 내가 하려던 정책과 기본 방향이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재정긴축과 고금리 정책은 받지 말았어야 했다.

재정긴축은 재정적자가 위기의 주요인인 남미에 쓰는 처방이었고, 고금리 정책은 원화가 국제통화로 통용되지 않고 있고 채권시장이 개방되지 않은 당시 상황에선 오히려 증시에서 달러가 빠져나가게 하는 잘못된 처방이었다.

그런데도 당시 협상팀은 애초 IMF의 구조조정 요구에 소극적으로 대응해 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졌고,김영삼 대통령은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서 "IMF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지원이 어렵고 그러면 국가부도 위기에 몰릴 것"이란 전화를 받은 뒤 협상단에 타결을 재촉하는 특별지시를 내린 것으로 안다.

결국 정부는 구조조정과 함께 긴축정책까지 다 받아들였다.

그로 인해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수많은 기업들까지 쓰러지고 수많은 실업자가 생겼다.

그것이 우리가 겪었던 위기의 진상이 아닌가.

98년 우리 경제는 성장기반 붕괴로 마이너스 6.7% 성장이란 참담한 상황을 맞는다. IMF 지원을 받으면서 우리의 계획과 의지에 의해 구조조정을 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가, 오히려 6·25 이후 최대 국난이라는 고통으로 이어진 것이다.

IMF행을 당초 예정대로 발표하고 실무협상을 시작했더라도 IMF는 역시 긴축재정과 고금리 정책을 요구하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초 합의 때 이루어졌던 IMF와의 '신뢰'를 깨지 않았더라면, 우리 협상팀이 거시정책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갖고 있었더라면, 우리가 구조조정을 스스로 해나가려는 의지를 분명히 했더라면 긴축정책은 얼마든지 협상에 의해 거부할 수 있었다고 나는 본다.

이것이 바로 IMF행 발표를 왜 번복했는지 명명백백하게 밝혀야 하는 이유다.

하지만 그 뒤 감사원·검찰·국회 등 소위 '진실 규명'에 나섰다는 어떤 기관들도 정작 가장 중요한 이 문제는 제대로 밝히려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치적 희생양을 잡는 데 급급해 있었으니까.

정리=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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