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때이른 사망선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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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8강전
[제8보 (128~149)]
黑. 송태곤 7단 白.왕시 5단

영화 속에서 무술고수 역을 맡으려면 어느 정도 무술에 능해야 한다. 바둑고수 역은 어떨까. 표정과 몸짓이야 누구나 하겠지만 손이 문제다. 돌 놓는 모습은 그 사람의 실력이나 수련의 정도를 그대로 반영한다. 얼굴은 근엄한데 손은 완전 하수의 모습일 때 기가 차고 만다.

또 판 위에 돌이 놓인 형태도 문제다. 바둑을 모르는 감독은 돌을 대충 늘어놔도 화면에 슬쩍 비치는 것인데 어느 누가 알랴 싶겠지만 바둑깨나 아는 사람들은 단박 저것도 바둑이냐고 실망하고 만다.

'영웅문'의 저자 김용은 열렬한 바둑 매니어인데 그가 원작을 쓴 중국 무협영화 '천룡팔부'에는 바둑고수들의 대결장면이 많이 나온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똑같은 실수가 이어져 중국기사들이 무척 서운해하고 있다는 소식. 사실 절정고수의 대국이라면서 18급처럼 돌을 갖다 놓으면 볼 맛이 사라지는 것 아니겠는가.

송태곤7단이 맵시 좋게 붙여간 흑▲가 백 대마를 노리고 있다. 왕시5단은 살얼음을 밟듯 조심하며 134까지 살아둔다. '참고도' 흑1로 찔러도 2, 4, 6을 선수한 뒤 A에 두면 살게 된다.

백의 줄타기는 좌변에서도 계속된다. 135의 차단 공격에 144까지 절묘하게 양쪽을 수습해낸 것이다. 불안하던 백돌들이 안정을 회복하면서 형세가 좀 더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계산서를 뽑아본 검토실에선 "덤을 피하기 어렵다"고 단정한다.

판은 아직 넓고 중앙은 온통 텅 빈 모습인데 벌써 흑에 사망선고가 내려지고 있다. B의 약점이 흑의 추격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라고 한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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