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유골' 파문…위기의 북·일관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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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북한과 일본 관계가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있다.

지난달 북한이 일본 정부에 전달한 납치피해자 요코다 메구미의 유골이 전혀 다른 사람의 것으로 판명됐기 때문이다.

9일 정치권에서는 "북한이 저렇게 나오면 우리도 경제제재를 통해 확고한 입장을 보여줘야 한다"(가타야마 도라노스케 참의원 간사장),"비정하고 냉혈한 자들이다. 이제 바로 제재로 가야 한다"(아베 신조 자민당 간사장 대리) 등 분노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연립여당 공명당은 물론 그동안 신중한 입장이던 제1야당 민주당의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대표까지 제재 필요성에 동감하고 나섰다. 사민당 등 군소정당을 제외한 정치권이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비교적 온건파로 불려온 호소다 히로유키(細田博之)관방장관도 "평양선언의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한 심각한 사건"이라며 "북에서 가져 온 다른 자료들을 앞으로 1~2주일간 자세히 검토한 뒤 결론을 내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문제는 과연 일본이 경제제재에 나설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올 초 북한에 대한 제재를 상정해 '외환개정법'과 '특별선박입항금지법'을 제정했다. 따라서 유엔의 결의 없이 일본 단독으로 송금.자산동결.수출입 규제 등을 할 수 있다.

북한에 있어 일본은 한 해 무역규모가 308억엔(약 3080억원)에 달하는 제3위의 무역국이다. 또 일본에서 북한으로 송금하는 액수는 한 해 수백억엔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처럼'돈'과 '물건'의 흐름을 차단하게 되면 북한으로서도 타격이 클 수밖에 없다.

실제 자민당이 마련한 '대북 제재 5단계 시나리오'에 따르면 이미 일본 정부는 경고단계라고 할 수 있는 1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8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가 당초 북한에 지원키로 했던 12만5000t의 쌀을 당분간 보내지 않기로 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 상태에서 더 강한 제재 쪽으로 당장 나아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경제제재를 발동할 경우 북한과의 협상은 사실상 차단된다. 그 경우 고이즈미 총리가 임기 중 최우선 목표로 내걸고 있는 국교 정상화는 사실상 물건너가게 된다.

다른 납치피해자의 진상조사도 사실상 무산된다. 두 차례나 북한을 방문하며 협상 분위기를 조성해 온 고이즈미로선 부담이 너무 크다. 고이즈미 총리가 8일 "협상은 계속돼야 한다"며 제재론에 제지를 가하고 나선 것이나 "북.일 평화선언의 토대가 무너졌다"로 돼 있던 외무성의 입장발표가 "평양선언의 정신이 훼손됐다"는 절제된 표현으로 바뀐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또 북한에 대한 제재는 단지 북.일관계뿐 아니라 6자회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도 중대 변수다.

북한은 그동안 "경제제재는 우리에 대한 선전포고와 다름없다"는 입장을 반복해 왔다. 안 그래도 온갖 이유를 대며 6자회담을 피하고 있는 북한이다.

일본의 대북 경제제재가 결정될 경우 6자회담의 판을 깨는 좋은 구실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일본으로선 6자회담에 임하는 미국 등 주변국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로선 대북 제재를 요구하는 강경론과 6자회담에 끼칠 파급효과까지 고려해야 하는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도쿄=김현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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