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3> 제99화 격동의 시절 검사27년 <4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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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김영삼 정부때 대검 중수부가 노태우(盧泰愚)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재벌들로부터 거둬들인 비자금 수사를 시작했다. 당시 대부분의 재벌그룹이 수사대상에 올라 롯데그룹 신격호(辛格浩)회장도 검찰의 소환 조사를 앞두고 있었다.
롯데와 나는 아무런 인연도 없고 그 쪽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실력자인 듯한 임원이 사무실로 찾아와 辛회장 변호를 맡아 달라고 했다.
辛회장은 조사받기 하루 전에 일본에서 귀국하기로 돼 있어 그 전에 그룹 고위 간부들이 나와 접촉했다. 그런데 문제는 롯데그룹에서 盧대통령에게 준 돈이 여러 계열사에서 나온 것인 데다 지출과 관련한 증빙서류를 만들거나 보관해 놓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얼마를 주었는지 금액을 확정짓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검찰 소환을 하루 앞두고 辛회장이 귀국했다. 소공동 롯데빌딩 辛회장 집무실로 갔다. 처음으로 인사를 하고 검찰 조사에 대비해 미리 준비한 나름대로의 자료를 갖고 의논을 한 뒤 다음날 아침에 만나기로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그 쪽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辛회장과 함께 대검찰청에 출석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한마디로 "그것은 곤란하다"고 잘랐다. 상대방은 나의 거절에 조금 당황하는 목소리였다. "대검 근처까지는 같이 가겠으나 검찰청사에 들어갈 때는 辛회장 혼자 들어가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해 내 뜻을 관철시켰다.
당시 재벌회장이나 유명 정치인들이 검찰에 출두할 때 변호인을 데리고 출두하는 것이 관행이었다.그러나 나는 변호인들이 재벌 총수나 정치인을 안내해 검찰청사 현관에 들어가는 모습이 TV 화면에 나오는 것을 내심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날 소공동 롯데빌딩으로 가서 辛회장과 같은 차를 타고 서초동 대검청사로 출발했다. 미리 롯데빌딩에서 서초동 대검찰청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 두는 등 재벌총수의 검찰출두에 대한 의전절차가 대단했다.
나의 요구로 예비 차량 한 대가 辛회장과 내가 탄 차량 뒤를 빠짝 따라 붙었다. 辛회장 차량이 검찰청 바로 근처 서초경찰서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예비 차량으로 옮겨 탔다. 그렇게 해서 辛회장은 다른 재벌 총수들과 달리 변호사를 대동하지 않고 혼자서 대검찰청사에 출두했다. 辛회장을 뒤따라 대검찰청에 들어갔더니 검찰청사 마당은 취재진과 회장을 수행해 온 각 재벌 회사들의 임·직원들로 시장바닥 같았다. 사무실로 돌아와 수사 진행상황을 기다리는데 밤늦은 시간에 대검 중수부에서 전화가 왔다.
내가 짐작한 대로 盧대통령에게 준 돈의 규모를 놓고 수사검사와 辛회장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수사가 진행되지 못하고 중단상태에 빠졌으니 변호인인 나에게 辛회장을 설득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사실관계 자체를 잘 모르는 변호인이 현재 상태에서 조사받는 사람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하여튼 수사가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 상태고 이대로 가면 철야조사를 받아야 할 형편인데 辛회장의 건강상태로 보아 걱정이 됐다.
결국 중수부 조사실에서 辛회장을 만났다. 辛회장은 "내 기억에 따라 진술을 하는 데도 검사가 믿어주지 않는다"며 불만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辛회장이 그 정도의 금액을 갖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辛회장을 설득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오늘 밤 철야조사로 갈 것 같고 盧대통령에게 준 돈이 조금 더 늘어나더라도 특별히 문제될 것은 없으니 검찰이 제시하는 액수를 그대로 인정하도록 권유했다. 辛회장은 나의 권유를 받아들였으며 결국 밤샘 조사를 받지는 않고 귀가했다.
결과적으로 辛회장은 당시 같이 조사받은 재벌 총수들 가운데 입건되지 않는 그룹에 들어갔다. 이처럼 사법처리 대상에서 제외됐던 辛회장은 롯데호텔의 특실로 나를 초대해 귀한 요리를 내놓으면서 "金변호사에게 큰 신세를 졌다"며 감사인사를 했다. 당시 대기업 총수 몇분이 불구속 기소된 데 비해 자신은 입건조차 되지 않은 것이 무척이나 기분 좋았던 것 같았다.
辛회장은 또 비서실에 지시해 나를 롯데칠성과 롯데건설의 고문변호사로 위촉해 주었다.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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