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진의 서핑 차이나]황제와 춤을⑦ 황제가 내기시합을 걸어온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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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난징(南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막수호(莫愁湖) 주위에 있는 누각 승기루(勝棋樓)를 잘 알고 있다. 이 누각이 명(明)나라 개국공신 서달(徐達)이 태조 주원장(朱元璋)과 내기 바둑에서 이겨 상으로 세워진 것이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난징의 어르신들 사이에서는 그 시합이 엄격히 말해 서달이 진 시합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막수호지(莫愁糊志)』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적혀 있다. 주원장이 일찌기 이 난징 삼산문(三山門) 밖 막수호 호반에서 중산왕 서달과 내기바둑을 뒀는데 바둑실력이 고수인 서달이 교묘한 방법으로 판세를 이끌어나가다가 마지막에 ‘만세(萬歲)’ 두 글자를 만들어 냈다. 이에 주원장이 크게 기뻐하여 그 자리에서 명령을 내려 막수호를 서달의 탕목읍(湯沐邑)으로 하사하고 서달과 바둑을 둔 자리에 누각을 세운 뒤 자신이 직접 승기루(勝棋樓)라는 현판을 써서 걸었다.

전설에 따르면 주원장과 서달은 모두 농사군 출신이었다. 아마 두 명 모두 바둑 솜씨는 변변치 못했을 것이다. 만약 이 둘이 바둑을 제대로 뒀다하더라도 막상막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주원장은 황제였고, 서달은 안후이성 출신의 촌부에 불과했다. 따라서 서달이 끈질기게 승부에 집착해 바둑에 이겼다면 이 또한 골치 아픈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황제란 일반적으로 예술적인 측면에서 유별난 것을 좋아하는 인간이다. 그는 권력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예술적인 호기심이 아무리 많아도 상관 없다. 그가 음악을 듣고 싶어 한다면 설령 음치라해도 황제 앞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 황제가 겉치레를 위해 명인을 사귀고 각종 문화행사에 참여하고 싶어 한다면 음악·바둑·서예·그림 등 그 어떤 분야에서 그 누구와도 함께 즐길 수 있다. 하지만 황제는 일반적으로 세상에서 성격이 괴퍅한 ‘예술가’다. 황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술을 활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알량한 재주를 뽐내 황제의 환심을 얻으려 한다거나, 자신의 주제를 모르고 황제에게 덤볐다가는 큰 화를 입을 수 있다.

황제는 모두 자신감이 넘치는 인물이다. 어떤 것을 하더라도 쉽게 시도해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실력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의견을 접할 수 없다. 위나라 문제 조비(曹丕)는 검술에 능했다. 저명한 무술의 대가 등전(鄧展)과 한 수 겨룰 기회가 있었다. 이전부터 등전은 무예 솜씨가 뛰어나 다섯가지의 창을 다루는 데에 정통했다. 하루는 조비가 등전과 술을 마시다가 검법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게 됐다. 마침 술기운이 한껏 돈 상태라 숙취를 깨게 하는 사탕수수를 먹고 있던 참이었다. 조비는 재빨리 수숫대를 집어 봉으로 삼고, 전각을 내려가서 서너 합 싸워 그의 팔을 세 번 내리쳤다.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크게 웃었다. 하지만 등전은 마음이 편치 않았는지, 다시 한번 겨루자고 요구했다. 조비가 “내 검법은 움직임이 빠르기 때문에 얼굴을 치기가 어려워서 전부 팔에 맞춘 것이오”라 말했다. 등전은 다시 한번 맞붙어 보고 싶다고 말했다. 조비는 등전이 목 부분에 일격을 가하여 승리를 거둘 심산임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깊이 전진하는듯 가장하자, 등전은 과연 그 수에 응해 치고 들어왔다. 조비는 재빨리 뒤로 물러서면서 등전의 이마를 베었다. 좌중의 사람들은 모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당시의 일화는 기록에 자세히 전해 내려온다. 후세 사람들은 이 사건의 속 뜻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 당시 등전이 조비와 겨뤄서 과연 정말로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까? 어림없는 일이다. 조비는 당시 마음만 먹었다면 등전을 죽일 수도 있었다. 사실 등전을 이긴 조비는 아직 황제에 오른 인물은 아니었다. 조조의 아들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벌써부터 신하와 시합을 하며 즐길 줄 알았다. 황제는 종종 글짓기 시합을 열곤 했다. 하지만 그 시합에서 올림픽 정신이니, 스포츠맨십이나 공평함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수(隋)나라 양제가 어느날 시짓기 시합을 제안했다. 압운에 ‘진흙 니(泥)’란 글자를 넣어 시를 짓는 시합이었다. 고관대신이었던 설도형(薛道衡)은 ‘빈 대들보에서 제비집 진흙이 떨어진다(空梁落燕泥)'란 싯구를 지어 주위의 칭찬을 들었다. 이에 황제는 자신이 신하보다 시 짓는 실력이 떨어짐을 부끄러워했다. 수양제는 이를 마음속에 담아두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설도형의 또 다른 싯구에서 꼬투리를 찾아냈다. 설도형이 선대 황제인 수문제의 업적을 칭송하여 쓴 글을 빌미로 삼아 그를 죽여 버렸다. 또한 왕주(王胄) 역시 ‘뜰 안의 풀이 사람이 없어도 여전히 푸르구나(庭草無人隨意綠)’라 노래해 황제의 역린을 건드려 설도형과 같은 처지가 되고 말았다. 상상해보라. 당신의 시가 황제보다 낫다해서 황제가 그것을 순순히 인정하리라 생각하는가? 수양제 역시 자신감에 넘치는 인물이었다. ‘신하들과 함께 시 짓기 시합을 해서 일등을 뽑는다면 당연히 황제인 내가 일등’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렇듯 자신감에 충만하고 속이 좁은 보스와의 내기시합에서 당신이 이길 수 있을까? 만일 황제의 이런 속내를 몰랐다고해서 당신에게 아무일도 생기지 않을 수 있을까? 이를 몰랐다면 당신의 번듯한 눈은 장님에게 주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황제와의 내기시합에서 신하는 당연히 황제를 이길 수는 없다. 게다가 너무 빨리 져서도 안된다. 그렇다면 황제는 당신을 무시할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황제와 치열하게 승부를 겨루다가 안타깝게 석패하는 것이다. 당신의 실력이 뛰어나지만 황상의 실력이 당신에 비해 조금 더 높다고 느끼게 만들어야한다. 이런 이유로 서달의 처세술을 배워야한다. 실력을 적절히 보여줌으로서 모두 승자가 되고 누구도 지지 않는 게임을 한 것이다.

사실 ‘페어플레이’를 하는 황제를 만났다해도 반드시 좋은 일은 아니다. 중국 전국시대에 진(秦)나라 무왕(武王)은 역도 경기를 좋아했다. 하루는 진나라의 유명한 장사인 임비(任鄙), 오획(烏獲), 맹열(孟說)을 불러 무쇠솥 정(鼎)을 들어올리는 시합을 열었다. 이에 오획, 임비 조차 손을 내저으며 “저희들은 경량급 선수입니다. 이는 중량급 선수도 하기 어려운 시합입니다. 왕께서는 참가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맹열은 시합을 꺼리지 않고 진무왕과 힘겨루기에 나섰다. 그 결과 진무왕은 시합 도중 사고가 발생해 무쇠 솥이 떨어져 허벅지가 부러졌다. 이로 인해 무왕은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시합에서 승리한 맹열은 온 집안 일가가 재산을 몰수 당한 뒤 참수당했다. 반면에 시합을 거부한 오획은 아무 피해도 입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후에 승진할 수 있었다.

신하가 황제와 더불어 할 일을 정사(正事)라고 한다. 글짓기 시합이니 힘자랑과 같은 것은 모두 부업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승부욕이 강해 이기기를 좋아한다면 주된 업무에서 남들과 겨뤄 이기면 그만이다. 음악·바둑·서예·그림 같은 류의 시합에는 단지 참여하는데 의의가 있을 뿐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된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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