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김화 전투 참전한 미국인 밥 베이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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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존 F 케네디 센터에서 백선엽 장군, 밥 베이커, 존싱글러브 예비역 소장(왼쪽부터)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지난달 31일 오후 7시 30분(현지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의 존 F 케네디 센터. “6·25전쟁의 영웅이자 한국 최초의 사성 장군”이라는 사회자의 설명과 함께 백선엽(90) 대한민국 예비역 대장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국 각지에서 모인 6·25전쟁 참전용사들과 가족 300여 명은 큰 박수로 백 장군을 환영했다.

미국 현충일인 이날 케네디 센터에선 한국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중 하나였던 강원도 김화지구 전투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어떤 희생도 감수하고 기지를 사수하라(Hold at all costs)’가 처음으로 상영됐다. 전쟁 막바지였던 1953년 6월 군사요충지인 이 지역의 ‘해리 전초기지(outpost Harry)’를 사수하기 위해 미군과 한국군, 그리스군이 물밀듯 밀려오는 중공군과 맞섰다. 영화 제목처럼 수많은 군인이 희생됐지만 기지를 지키는 데는 성공했다.

1시간 30분짜리 이 영화에는 전투에 직접 참가했던 미 보병 3사단 소속 군인과 간호사, 한국 카투사와 그리스 군인은 물론 중국 인사들의 울먹이는 증언까지 등장해 전쟁의 참혹함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끔찍했던 당시의 영상들이 화면을 채울 때 마다 관객석에선 충격 섞인 신음이 터져 나왔다. 영화는 전후 한국의 눈부신 발전상과 북한의 열악한 상황을 대조시켜면서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라는 문구로 끝을 맺었다. 주최 측은 함께 관람한 김화지구 전투 참전용사 10여 명을 일으켜 세운 뒤 힘찬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대신했다. 당시 전투중 입은 부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노병도 있었다.

미국에 거주하는 딸 남희씨 내외와 영화를 관람한 백 장군은 “(6·25전쟁에 참전한) 150여만 젊은 군인의 땀과 피로써 우리를 지켜줬전 미국이 자유의 소중함을 잊지 않기 위해 영화까지 만든 것에 감사한다”고 말했다. 영화에 등장한 뉴트 깅그리치(67) 전 미 하원의장은 시사를 본 뒤 “아버지가 한국전 참전용사여서 더욱 감회가 깊다”며 “한국군과 미군의 용기가 북한의 야욕을 막고, 오늘날 한국의 번영과 안전을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영화 제작을 총괄한 밥 베이커(78)는 21살 때 미 3사단 소속 상병으로 김화지구 전투에 참전했다. 6·25전쟁을 기억하는 사업을 펼치기 위해 사재 100만 달러를 털어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만들고, 미 전역에 흩어진 참전 용사들을 찾아 나섰다.

베이커는 “전쟁 당시 매일 밤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훗날 성공해서 이 상황을 반드시 알리겠다’고 신과 동료 전우들에게 다짐하곤 했다”며 “가장 치열했으면서도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전투를 세상에 알릴 수 있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그는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사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이 영화를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희망한다”며 “11월 미국 보훈의 날에 즈음해 TV를 통해 미 전역에 방송하고 그 뒤 30개 국에서 영화 상영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베이커는 “젊은 날 쉽지 않은 경험이었지만 진심으로 한국을 사랑하며, 한국인이 늘 자랑스럽다”고 강조했다.

영화 속 증언자엔 존 싱글러브(89) 예비역 소장도 있었다. 76년 주한 유엔군사령부 참모장으로 근무하던 중 지미 카터 당시 미 대통령의 주한미군철수 계획에 반대하다 퇴역당했던 그는 김화지구 전투 당시 대대장이었다.

그는 자신이 사는 테네시주에서 워싱턴으로 건너와 ‘왕년의 전우’ 백 장군과 반갑게 해후했다. 지금도 이라크전 부상자 지원과 특수작전 강의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싱글러브 장군은 천안함 사건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그는 “76년 북한의 도끼 만행사건 당시 전쟁을 준비한다는 각오로 한미가 협조해 강력하게 대응하자 김일성이 처음으로 사과했다”며 “일종의 전쟁행위를 벌인 김정일이 다시는 공격해 놓고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확고한 대응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김정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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