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해신 - 제1부 질풍노도 (11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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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김양이 취한 행동은 태사공이 쓴 『자객열전』에 나오는 한 부분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엄중자(嚴仲子)가 자객 섭정을 포섭하기 위해서 사용했던 방법 그대로였던 것이다.

자객 섭정도 사람을 죽이고 외딴곳으로 도망쳐 백정노릇을 하면서 노모를 모시고 있었던 살인자였다. 섭정을 자객으로 맞아들이기 위해 엄중자가 제일 먼저 했던 행동은 주연을 베풀고, 황금 백일(百鎰)을 받들고, 술잔을 들어 섭정의 모친에게 축수하는 것이다. 먼 훗날 엄중자의 뜻을 받아들여 자객이 된 섭정은 이렇게 말하였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일개 시정잡배로서 칼을 휘둘러 개, 돼지 도살이나 하고 살아가는 보잘 것 없는 백정이다. 그런데 엄중자는 제후의 경상(卿相)신분으로 천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수레를 몰아 찾아와 나 같은 천민과도 사귀었다. 또한 백금을 들어 어머니의 장수까지 축원해 주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를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지 않은가."

그리하여 섭정은 엄중자의 원수인 한나라의 제상 협루(俠累)를 찾아가 단칼에 척살해 버렸던 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면 엄중자의 정체가 발각될 것을 염려하여 섭정은 다음과 같이 행동하였다고 『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섭정은 그 혼란의 틈에서 칼로 이마를 그어 자신의 낯가죽을 벗겨버렸다. 두 눈까지 도려낸 뒤 삽시에 배를 갈라 창자를 끌어낸 뒤 죽어버렸다. 그러니 누구도 그의 정체를 알아낼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김양은 꿰뚫어 보고 있었다.

살인죄를 짓고 풀려나 떠돌이 백정 노릇으로 간신히 연명하고 있는 염문을 위해 죽은 노모의 장례를 성대하게 치러준다면 반드시 염문은 자객 섭정처럼 적당한 시기에 김명을 척살하여 죽일 것이다.

옛말에도 있지 않은가.

차도살인(借刀殺人).

남의 힘을 빌려 사람을 죽인다는 뜻으로 염문의 칼을 빌려 김명을 먼저 제거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며칠 뒤 김양순이 돌아와 김양에게 보고하였다.

"도독 나으리. 하명하신 대로 거행하고 돌아왔나이다. 성대하게 5일장을 치르도록 하고 입관하여 매장토록 하였나이다. 인근 사찰에서 부도를 불러 천도재까지 올려주었나이다."

"그랬더니 뭐라 하더냐."

김양이 묻자 김양순이 대답하였다.

"백골이 난망이라 하였나이다."

"그것뿐이더냐."

"도대체 누가 이처럼 큰 은덕을 베풀어 주셨나이까, 하고 울면서 소인에게 물었나이다."

"그래 뭐라고 하였느냐."

그러자 김양순이 대답하였다.

"나으리께오서 일체 모든 일들을 엄중히 비밀리에 부쳐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나이까. 그래서 다만 이렇게 말하였을 뿐이나이다. 차차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나이다."

"잘했다. "

김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정체는 늦게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좋은 것이다.

그때였다. 김양순이 따로 가져온 물건을 두 손으로 받쳐 올리면서 말하였다.

"도독 나으리, 떠나올 무렵 염문이 소인에게 이 물건을 내어주면서 이렇게 말하였나이다.'소인은 이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나이다. 한때 악공 일을 할 때 쓰던 악기인데, 소인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한 것이나이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사오나 큰 은덕을 베풀어주신 어르신께 이것을 신표로 받쳐 올리겠나이다'하면서 이 물건을 전해주도록 신신당부하였나이다."

그것은 필률이었다. 복숭아 껍질로 만든 세피리였는데, 당대 최고의 명인이 사용하던 악기답게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 윤택이 흐르고 있었다. 염문의 말은 절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염문에게 있어 그 피리는 목숨 이상으로 애지중지하던 보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한갓 피리가 아니다.

회심의 미소를 보이며 김양이 중얼거려 말하였다.

내가 원하는 것은 너의 칼이다. 그리고 너의 목숨인 것이다.

글=최인호

그림=이우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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