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성(性)의 혁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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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무대의 막이 열리면서 객석의 숨소리가 멎는다. 1인극을 이끄는 배우 서주희가 등장한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러나 파격적인 단어들이 소낙비처럼 주룩주룩 쏟아진다. 그 충격으로 관객인 필자의 얼굴이 화끈거리고 민망스러워져 몇번이나 자리를 고쳐 앉는다.

우리가 거의 금기시해왔던 여성의 성기와 성행위에 관한 담론들이 이어진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진지한 나머지 작품과 관객 사이의 벽이 허물어지는 것 같은 분위기가 깔린다.

요즘 화제가 되고있는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공연되고 있는 서울 대학로 소극장의 풍경이다. 5~6쌍의 중년부부를 제외하곤 거의 20, 30대 중후반의 여성들로 자리가 가득 메워졌다. 객석에 있던 전문직 여성이 스스럼없이 무대로 올라가 버자이너(질.膣)에 관한 주연배우의 인터뷰에 응한다.

관객들이 작품의 소재에 익숙해지면서부터 공연은 유쾌하게 진행된다. 극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이브 엔스러의 원작인 이 작품은 성폭력 등 '여성의 성'에 관한 본질적인 문제에 접근하며 성의 해방을 강조한다. 세계 곳곳에서 투어 공연을 해왔다.

한때 타임지의 표지인물로 등장했던 여성 해방운동가 케이트 밀레트는 '성의 정치'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성 행위 자체에 대한 여러 가지 묘사에 권력과 지배의 개념이 연출되고 있음을 밝혀내고 이것을 구체적으로 예증하려고 시도했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구조를 '성과 정치'의 연관성에서 포착해 여성운동의 이념과 방향을 설정하는 철학적 이론을 제공했다. 19세기에 입센이 저술한 '인형의 집' 주인공 노라 이래 약 1세기 만의 신(新)여성해방운동이라고 불려질 정도였다.

성문제를 경제적 시각에서 바라본 학자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베커 교수다. 성의식의 변화로 여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여성인력의 사회적 진출기회가 커지면서 독신율과 이혼율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데 주목했다.

50여년 전에 나왔던 미국인의 성의식에 관한 킨제이 보고서가 교육.보건.주택.사회도덕 등 여러 가지 문제를 검토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적령기를 전후한 남녀에게 '결혼 쇼핑'은 인생에 있어 아주 중요한 투자다. 50대 이후 세대를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성혁명이 그들의 결혼과 그들이 이끌고 갈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끊임없는 연구가 필요하다.

한쪽을 얻으면 다른 한쪽을 잃게 되는 트레이드 오프의 긴장관계에 대해서 보다 진지하고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최철주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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