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일류들의 24시] 2. 홍콩 염정공서 처장대리 길버트 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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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홍콩 염정공서(廉政公署 ·ICAC)의 수사관들은 “평생 부패를 쫓아다니겠다”고 맹세한 사람들이다.

부패 수사의 원칙은 ‘소리없이 그러나 끝까지’.사사로운 인정(人情)은 금물이다.길버트 찬(陳德成 ·47 ·사진) 염정공서 처장(處長)대리는 경력 25년의 베테랑 수사관이다.

염정공서(廉政公署)는 부패 인지.척결을 '사회의 생존조건'이라고 믿고 행동으로 옮기는 기관이다. 홍콩에만 있는 독특한 수사기구로, 정부.민간을 가리지 않고 부패만 전문적으로 조사한다.

이 기관은 육중한 건물 내에 근엄하게 들어앉아 있지 않다. 거리 한켠에 구멍가게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 누구나 물건사듯 쑥 들어가 '맘 편하게' 털어놓고 제보할 수 있는 공간이다.

직원도 보석가게 점원처럼 상냥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염정공서는 타락한 사회인에겐 공포의 대상이다. 독일 베를린에 본부를 둔 국제투명성기구는 지난해 연례보고서에서 염정공서를 '세계에서 가장 덜 부패한 기구'로 꼽았다. 역시 사정기관으로서 권위의 출발점은 서슬 퍼런 '자체정화'였다. 보고서는 홍콩의 청렴지수를 세계 14위(한국 42위)로 꼽으면서 "홍콩의 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고 칭찬했다.

길버트 찬 처장대리는 집행처 조사3과의 책임자로 1977년 대학졸업과 동시에 입서(入署)했다. 집무실에서 기자와 마주 앉기 전 길버트는 뒷벽에 걸린 액자부터 소개했다.

'자강불식(自强不息)'. 자신을 절차(切磋)하고 탁마(琢磨)하길 늘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는 얘길까. 방전(放電)으로 스파크가 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 정한(精悍)한 모습에 맞서듯 일부러 심술궂은 질문부터 던졌다.

-사람을 잡아 넣는 직업인데, 후환이 두렵지 않은가.

그는 빙긋 웃더니 "두렵다"고 순순히 '자백'했다. 재차 찔러봤다.

-보복이나 협박을 경험한 적은 있나.

"있다. 그러나 위험이 동반하는 스트레스는 일의 일부로 친구로 받아들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이 훈련에 실패하면 두 가지를 잃는다. 첫째가 일이고, 나머지는 건강이다. 모든 걸 잃는 셈이다."

-직업에 대한 가족들의 반응이 궁금한데.

"나와 결혼한 뒤 아내는 친구들을 잃었다.남편 직업을 듣곤 상당수의 친구들이 연락을 끊었다. 그땐 그런 시절이었다. 너나없이 오염됐던 시절, 수사관은 경원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식구들만 예외였다. 장인은 사위감의 직업을 듣고는 '원더풀!'이란 탄사로 환영했다."

이처럼 험한 일을 길버트는 왜 택했을까.

"대학을 갓 입학했던 73년의 일이다. 피터 고드버라는 고위 경찰관이 수뢰 혐의로 구속됐다. 놀랄 만한 부패상이 햇빛 속에 드러났고, 과연 이를 경찰이 처리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이 사건은 74년 염정공서 설립으로 이어졌다. 난 이때부터 염정공서를 평생의 직장으로 점찍었다."

-20여년 수사관 생활 중 가장 어려웠던 기억은.

"95년 대규모 담배밀수사건을 수사했을 때였다. 뇌물이 연루된 밀수사건이기 때문에 염정공서가 수사 주체가 됐다. 그러나 용의자 중 증언을 약속한 인물이 증언 전 싱가포르에서 산 채로 수장됐다. 자책감 때문에 한동안 어지럼증을 앓았다."

-금전 유혹을 받은 경험이 있나.

"다행히 아직은 없었다. 전 직원의 재정상태는 늘 면밀하게 체크된다. 재정파탄이 부패의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염정공서 직원에 대한 비리 제보는 비록 익명일지라도 우선적으로 처리된다. 수사 개시 여부는 물론 수사 내용과 입건 및 기소 여부를 민관합동기구인 '염정공서 자문(諮詢)위원회'에 보고해야 한다. 염정공서 출범 이래 부패에 연루된 직원이 단 2명에 그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린 우리 스스로를 유리알처럼 내보이며 산다."

그래도 궁금증은 남았다. 어느 나라든 등잔 밑이 어둡지 않을까.

-염정공서가 도대체 뭣 때문에 성공했다고 보는가.

"정부의 전폭적 지원이다. 첨단장비 구입.인력충원도 최우선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공공의 신뢰다. 시민은 우리를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서슴지 않고 염정공서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래 결국 돈이다. 돈을 넉넉하게 부어주니까 부패가 고일 자리도 없어졌다. 지난해 염정공서가 쓴 예산은 7억 홍콩달러(약 1천2백억원)에 달한다. 홍콩 인구가 불과 6백70만명이니 시민 1인당 수사비가 무려 2백만원 가깝다.

수사관에 대한 대우도 일급이다. 길버트는 매달 약 10만 홍콩달러(약 1천7백만원)쯤 받는다. 여기에 주택비.의료비.교육지원비.차량지원비.근무수당.직책수당 등을 따지면 15만 홍콩달러가 넘는다. 한국은 얼마쯤 될까.

그러나 시샘은 접어두기로 했다. 훌륭한 이웃은 우리에게도 복일테니까. 그에게 염정공서의 향후 과제를 물었다.

"지금부터는 사이버 시대다. 염정공서의 수사목표는 검거를 넘어 돈을 압수하는 데 있다.

부패로 얻은 돈은 반드시 빼앗는 것은 앞으로의 범죄를 막는 최선의 예방약이다. 이를 추적하는 데 필수품이 바로 컴퓨터다."

인터뷰 말미에 개인적인 포부를 묻자 길버트는 서슴없이 "평생 염정공서에서 일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홍콩=진세근 특파원

*** '부패 수사' 염정공서

염정공서는 1974년 부패만 전문적으로 수사하기 위해 설립한 독립수사기관이다. 염정공서의 서(署)는 '독립기관'을 뜻한다.

최고통치권자인 홍콩특별행정구 행정장관(CE)직속이며, 정.재계와 시민단체의 인사로 구성된 '염정공서 자문위원회'에만 보고를 한다.

염정공서 최고책임자는 염정전원(廉政專員) 알란 라이(黎年)가 맡고 있다. 그 아래 수사를 맡는 집행처와 행정총부.사회관계처.부패방지처의 네개 부처가 있다.

염정공서에 대한 불만과 투서사건을 다루는 불만처리조직은 별도로 운영한다.

염정공서의 특징은 부처마다 상위조직으로 자문위원회를 둔다는 점이다.

염정공서 전체를 관장하는 염정공서 자문위원회를 비롯해 집행처.사회관계처.부패방지처.불만처리 등 조직마다 담당 자문위원회가 따로 있다. 행정총부만 자문위원회를 두지 않고 있다. 각 자문위원회는 행정부.입법부.사법부 대표와 재계.직능계.학계.시민단체 대표 등 10여명으로 구성된다.

자문위원회 제도는 안 그래도 막강한 염정공서의 감독.지휘권을 행정장관 1인에게만 맡겨놓을 경우 부패수사가 왜곡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 탄생했다.

자문위원회는 결코 '고무도장'이 아니다.

각 부처는 주요 사건마다 수사 착수와 기소.입건 여부를 자문위원회에 보고하고 승인받아야 한다. 자문위원회가 깐깐한 시어머니 역할을 하는 셈이다.

염정공서의 전체 인원은 지난해 12월 31일 현재 1천2백85명.이중 집행처 수사관이 9백32명으로 압도적이다.

*** 길버트 찬은

길버트 찬은 염정공서의 핵심부서인 집행처에서 정부부문을 담당하는 제3과 책임자다. 직위는 염정공서 내 서열 4위에 해당하는 처장대리.

길버트의 지휘를 받는 수사관만 무려 1백60명이다. 1977년 홍콩 중문(中文)대 경영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범죄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홍콩 변호사 자격증도 있다.

길버트는 실무분야에만 전문가가 아니다. 염정공서의 수사원칙과 목표, 문제점을 연구.분석하는 역할도 맡고 있다.

요컨대 연구하는 수사관인 셈이다. 99년 염정공서 창립 25주년 기념식 캐치프레이즈를 '염정공서를 북돋워 새천년으로 나아가자(齊倡廉 跨紀元)'로 정하고 심포지엄 의장을 맡은 인물이 길버트였다. 한마디로 '잘 나가는 염정공서 맨'이다.

아내와 두 딸을 뒀는데, 큰 딸은 미국 코넬대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하고 있다. 길버트는 "가족들이 아빠를 자랑스러워 하는 점이 가장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만약 딸이 염정공서 수사관이 되겠다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망설임도 없이 "적극적으로 밀어주겠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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