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격동의 시절 검사 27년 (2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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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검사의 길

11. 땅끝까지

장흥지청으로 부임하기 위해 기차를 탔다.아침 10시에 영등포역을 떠난 기차가 6시간이 지난 오후 4시쯤 영산포역에 도착했으니 어지간한 거리다. 초행길인 데다 수많은 상념 때문에 더 멀고 지루했으리라.

영산포역은 시골 간이역이었다.내리는 사람이 나를 포함해 10여명밖에 되지 않았다.

역에 내리니 장흥지청 운전기사가 차를 가지고 나와 있었는데 일제 크라운 6기통 세단이었다. 당시 검찰청 공용차는 케네디 지프였는데 지청장이 자신의 차를 보낸 것이었다. 시골지청에 이렇게 훌륭한 세단이 있다는 것이 의외였다.

4월 중순의 늦은 봄 유치산(有治山)고개는 더위로 푹푹 쪘다.'땅끝'이라고 하더니 굽이굽이 도는 산허리는 끝이 없는 것 같았다. 한국전쟁 때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빨치산의 본거지로 알려진 것처럼 길이 험준했다. 구절양장(九折羊腸)같은 비포장 산길 옆으로 담배 농사가 한창이었다.

아침 일찍 길을 나선 탓도 있겠지만 지난 밤의 과음으로 머리가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다.

영등포지청 김병리 부장, 동료 검사들과 통행금지도 무시한 채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울분을 토하면서 현실을 비웃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귀양가듯 좌천의 길을 가야만 하는가.

지난밤 술자리에 동석했던 선배와 동료.후배들 모두 나를 위로하기보다는 검찰 지휘부를 안주 삼아 마음껏 비판하면서 울분을 토해냈다.

험준한 산길에다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을 달리다 보니 답답하기 그지 없었다.유배지로 가는 길은 이처럼 지루하고 짜증났다.

아까부터 말없는 내 표정을 백미러로 힐끗힐끗 살피는 기사에게 "장흥까지 얼마나 남았냐"고 묻자 1시간은 더 걸린다고 했다. 산허리를 돌아 내려오니 탐진강이 보였다.

가슴이 답답해 차를 길옆에 세우게 한 뒤 냇가의 큰 돌덩이에 앉아 강물에 발을 담갔다. 물에 비친 내 모습을 보니 산길을 달리며 덮어 쓴 노란 먼지가 머리 위에 쌓여 털모자를 쓴 사람 같았다. 쓴웃음과 함께 순간 이유 모를 눈물이 핑 돌았다. 행여 기사가 눈치라도 챌까봐 얼른 세수를 했지만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얼마동안 하염없이 넋을 놓고 냇가에 앉아 있으니 기사가 "이제 가시지요"라면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퇴근시간 전까지 청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관내의 7개 군(郡)기관장과 유지들이 나를 환영하기 위해 청에 와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 중에는 완도.해남 등 꽤 먼거리에서 온 분들도 있어 그 분들이 돌아가려면 퇴근시간 전까지는 청에 도착해야 한다는 설명이었다.

기사는 그동안 몇명의 귀양객과 함께 오늘처럼 유치산 고개를 넘으며 그들의 쓰린 마음을 안타까워하며 눈치를 살폈을까.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다시 차에 올랐다.

탐진강을 옆에 끼고 비포장의 시골길을 달리자 이윽고 장흥 시내로 접어들었다. 큰 강을 사이에 두고 읍은 두 부분으로 나눠져 있었다. 다리를 건너 복잡한 7거리를 지나 장흥지청에 도착했다. 지청의 초입에서 청사까지 오르는 언덕의 양쪽에는 수백 년은 족히 돼 보이는 낙락장송들이 늘어서 있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해질 무렵의 산중 사찰과 같은 느낌을 줬다.

터널과도 같은 소나무 길 양 옆에 군수와 경찰서장.교육감 그리고 농협 등의 관내 기관장과 유지들이 도열해 있었다. 각 군에서 온 기관장만해도 40여명은 돼 보였고 검찰 직원까지 포함해 1백여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길 양편에 서 있는 사람들과 인사도 제대로 교환하지 못한채 지청장과 과장.검사 들의 안내에 따라 청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청사는 일제시대 때 지어진 목조 건물로 복도를 걸을 때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나고 실내가 어두워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백열등 전구를 켜야 할 정도였다. 흰 횟가루로 된 벽은 언제 칠을 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낡아 보였고 재래식 화장실에 청사 전체가 남루하기 그지 없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청사를 곧 신축할 계획이라 건물에 전혀 손을 대지 않은 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경회 <전 한국 형사정책 연구원장>

정리=이상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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