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운영의 독서칼럼] 겨우 마치는 숙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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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지난 5월 어느날 사내의 J형이 조용히 얘기할 것이 있다면서 다짜고짜로 휴게실로 끌고 들어갔다. 피로에 지친 기자들이 잠시 눈을 붙이는 그곳은 대낮에도 불을 꺼서 마법사의 동굴처럼 어두컴컴했다.

용건인즉 자신이 이렇게 훌륭하게(!) 된 것은 어느 개구리 얘기 때문이며, 바로 그 이야기가 최근 책으로 묶여 나왔으니, 내가 서평을 써주면 고맙겠다는 것이었다.

젠장 개구리야 동물학자 소관이지 경제학자가 무슨 소용이냐고 한번쯤 엇지르고 싶었지만, 그 괴괴한 휴게실 분위기며 착 내리 깔은 '조폭'스타일의 말씨에 나는 완전히 기가 죽었다. 이런 순진한(?) 친구를 잘못 건드렸다가는 큰일난다 싶어서 "어이, 그 숙제 연말까지 하면 안돼?" 하고 얼른 위기를 피했다.

***교회 자리에 대신 성서를

책을 받고 보니 기간(旣刊) 세 권이 벌써 1천2백쪽을 훌쩍 넘었다. 나머지 여섯 권이 근간으로 예고된 노평구 편집의 『김교신 전집』(부키.2001)이 그것이다. "하루아침에 명성이 세상에 자자함을 깨어 본 바이런은 행복스러운 자이었다.

마는 하룻저녁에 '아무런대도 조선인이로구나!' 하고 연락선 갑판을 발구른 자는 둔한 자이었다"(1권 19쪽). 1927년 7월에 창간된 『성서조선』-성조지-의 창간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얼핏 들으면 '성서를 연구하는 조선의 잡지' 정도로 생각하기 쉬우나, 창간 취지는 그렇지 않았으니 "다만 우리 염두의 전폭(全幅)을 차지하는 것은 '조선' 두 자이고 애인에게 보낼 최진(最珍)의 선물은 성서 한 권뿐이니 둘 중의 하나를 버리지 못하여 된 것이 그 이름이었다.

" 요컨대 성서와 조선은 '동격'이며, 그래서 이르기를 "『성서조선』아, 너는 소위 기독신자보다도 조선혼을 소지(所持)한 조선 사람에게 가라, 시골로 가라, 산촌으로 가라. 거기서 나무꾼 한 사람을 위로함으로 너의 사명을 삼으라"(1권 21쪽).

김교신 출생 1백 주년 기념으로 간행하는 이 전집은 성조지에 게재된 그의 수상.평론.강의.일기.편지를 주제별로 망라한 것이다.

내가 김교신을 처음 들은 것은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조선 최초의 무교회주의자를 고르라는 사지 선다형의 질문에 그의 이름이 나왔기 때문이다.

한때 나는 예수가 실패한 것을 바울이 완성했다는 어느 철학사가의 역설에 꽤나 반했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끝났을지 모르는 예수의 가르침을 바울이 교회를 세워 신앙으로 전했다는 주장인데, 그 내용 못지 않게 레토릭이 근사했었다.

그러나 교회 현실을 바라보면서 예수가 성공할 수도 있었던 것을 바울이 실패로 이끌지 않느냐는 의심이 들고는 했다. 30년대의 김교신 역시 "전혀 거룩하지 않은 '교회'를 거룩한 것이라고 거짓말하는"(2권 2백22쪽) 저들은 "재림하는 예수라도 다시 붙잡아 십자가에 거는 소임밖에는 다할 것이 없는 자들"(2권 2백25쪽)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했다.

무교회주의는 한마디로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신앙이다. 기존의 교회 자리에 성서를 갖다놓는 이들의 도전은 교회주의와의 대비 개념으로서만 의미가 있다. 김수영은 61년 4월의 일기에서 "신문의 아편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생각하여보아라.

申××가 되지 마라. 內村鑑三가 되라. H.G.Wells가 되라"고 썼다. 뒤에 알았지만 우치무라 간조는 무교회주의의 사부로서 유영모.김교신.함석헌 등의 조선 유학생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들한테는 "설령 우치무라 선생의 내심에는 무교회주의란 것을 건설하며 고취하려는 심산이 있었다 할지라도 내가 배운 것은 무교회주의가 아니오 '성서의 진리'였다"(2권 2백49쪽).

그리고 "김교신 선생의 애국은… 이승만의 정치입국이나 김구씨의 살인입국이 아님은 물론 김성수의 경제입국이나 안도산의 교육입국과도 딴 길로서…민족의 도덕적 개조를 목표한 종교입국, 도덕입국이었다"(별권 56쪽)는 노평구의 평가는 후세에 맡기도록 하자.

***개구리의 애국 이야기가

우국 소년 J를 감동시킨 개구리 얘기를 마저 해야겠다. 김교신이 기도 장소로 이용하던 폭포 밑의 작은 연못에 개구리 시체가 떠올랐다.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에 작은 담수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동사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1권 38쪽). 42년 3월호의 이 권두언 '조와'(弔蛙)는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결국 『성서조선』의 '조사'가 되고 말았다.

참 혹독한 계절이었다. 숙제를 끝내는 내게 망외의 소득이 있다면 일례로 "현금(現今)은 비록 당년(當年)의 정치적 위력을 조상(凋傷)하였다 할지라도 영계(靈界)의 장부자(丈夫者)인 키에르케고르의 향토인 명예를 보지하여"(1권 62쪽) 식으로 이어지는 60여년 전의 그 유장한 문체를 읽는 재미였다. 글쎄 그게 덴마크 소개라니까.

정운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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